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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 깐징 (@kankan_jing) / 오다+다자 조합


 


   01.

 


 까칠한 밧줄의 느낌이 이상하게 생경했다. 근처에 버려져 있던 박스 하나를 주워와 그 위에 올라서서 머리 위의 나뭇가지에 줄을 단단히 매듭지어 묶는 동안에도 손에 닿는 그 촉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모리가 붙여준 파트너, 그러니까 그 잘나신 츄야의 훼방으로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던 자살 시도가 오늘은 꼭 성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츄야를 따돌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코요 누님이 응접실에서 보자고 하신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츄야는 일단 의심부터 하고 봤다. 그래서 다자이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되받아쳤다.


 "코요 누님을 두고 내가 거짓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츄야?"


 그 말에 나카하라는 네놈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냐며 구시렁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기 전, 문 앞에서 그는 다자이에게 삿대질을 하며 한마디 툭 뱉고는 문을 소리 나게 닫고 나갔다. 또 자길 속이고 도망가서 그 망할 자살을 하려고 하는 거면 가만두지 않겠다나 뭐라
나. 가만두지 않는다라... 츄야 손에 죽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 손으로 이 숨통을 끊을 거야. 자살을 시도할 명분이 생겼다. 차라리 스스로의 손을 빌리는 것이 천배 만 배 낫다. 다자이는 침대 밑에 숨겨둔 밧줄을 꺼내 들고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살며시 열었다. 그 틈으로 도둑고양이처럼 바깥을 훔쳐보니 저 멀리에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복도를 걸어가는 츄야의 뒷모습이 보였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자이는 문을 활짝 열고 복도로 나와서는 두 손으로 손나팔을 만들어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대고 소리쳤다.


 "츄-우-야-"


 나카하라가 멈춰섰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코요누님이 늦으신다면서 조금 기다려달라고 하셨어!"


 나카하라는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손을 들어 휘휘 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다자이는 씨익 웃으면서 그가 가는 방향과 반대로 빙글 돌아 산책하듯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마~않이 늦으실 걸?"
 다자이가 낮게 웃음소릴 흘리면서 중얼거리는 소릴 나카하라가 들었을 턱이 없었다. 나카하라 츄야가 다자이의 말이 거짓말임을 알고서 응접실 벽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데까지는 약 53분이 걸렸다.

 


                             *

 


 다자이는 그 길로 포트 마피아 건물을 나와, 20분 정도 걸었다. 날씨는 맑았다. 햇빛이 따갑고 하늘이 푸르렀다. 푸른 하늘 군데군데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떠다녔다. 사람들을 지나치고 상점들을 지나쳐서 다자이가 도착한 곳은 근처의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장소를 그곳으로 정한 까닭은 간단했다. 슬슬 더워지고 있는 이 초여름에 조금이라도 쾌적한 곳에서 죽고 싶었기 때문에. 시원한 곳에서 죽어보겠다고 에어컨 빵빵하니 틀어놓은 관공서나 은행에 들어가서 목을 매달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물론 다자이는 그것도 그것대로 재미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경찰이 오면 일이 귀찮게 돌아갈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실행으로 옮기진 않았다. '집이 어디니 꼬마야?' 하고 물을 경찰에게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포트 마피아라고 답했을 때의 당황한 표정을 보는 것이 재미있기야 할 테지만, 후에 들을 츄야의 윽박지름은 전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성가신 파트너는 모리의 부탁을 받기라도 한 것인지 질색하면서도 그를 관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요즘 다자이와 나카하라는 뜻밖의 추격전을 매일같이 찍고 있었다. 나카하라를 어떻게든 따돌리고, 밧줄이든 칼날이든 스스로의 몸을 해하려고 해 보려 치면, 꼭 그 직전에 나카하라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쫓아 들어왔다.


 "우웩, 츄야. 또 자네야? 질리지도 않아?"


 "개소리한다, 씹새끼. 누군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냐?"


 "그럼 안 하면 되잖아. 싫다아~ 츄야,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아?"


 "지랄하고 자빠졌네. 네놈이 포트마피아 안에서 그 빌어먹을 자살 운운하는데 두 손 놓고
죽게 놔두리?"


 다자이는 그 뒤에 나카하라가 누구 좋으라고, 하며 나지막이 덧붙이던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래서 오늘, 다자이는 포트 마피아 바깥으로 나가서 죽기로 결정했다.


 아마도 츄야가 거짓말을 알아채기까지 걸릴 시간은 1시간 남짓. 걸어오는데 20분 정도 걸렸으니 아주 느긋하게 죽음을 시도할 만한 시간이 남았다. 다자이는 츄야가 정말 그가 자신의 거짓말에 속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나카하라 츄야는 멍청이가 아니다. 어렴풋이 거짓말임을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확실한 물증이 없으니 말을 꺼내지 않는 것뿐이었다. 퍽 신중한 남자였다. 그 불같은 성정과는 반대로. 그래서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면서도 당해준다는 그 분위기가 심기를 긁었다. 물론 나카하라 또한 그를 곱게 보는 것은 아니니 피차일반일 뿐인 이야기다.


 지금쯤 나카하라는 거짓말임을 어느 정도 눈치챘으면서도 혹시 모를 가능성 때문에 응접실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욕지거릴 내뱉고 있을 것이다. 혹여 그가 후에 다자이의 행방을 알게 된다고 해도 다자이 오사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 가능성이, 오늘은 있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실패하지 않는 이상. 다자이는 이상한 희열감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단단한 이 사이로 짓눌리는 연약한 입술이 비명을 질렀다. 오늘은,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가슴께가 뻐근하도록 차오르는 원인 모를 희열감을 진정시키기엔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던 모양이다.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으려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자 손에 들고 있던 밧줄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까칠했다.

 


 02.

 


 등산로로 꾸며진 입구는 물론이요, 꽤 깊숙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변은 빈말로도 잘 닦여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관리한 지가 오래된 탓일지도 모른다. 주변의 산 중에서 이곳에 가장 빨리 등산로가 만들어졌다는 말을 듣고서 이 곳으로 온 것인데, 과연 그 판단은 적절했다. 낡고 먼지가 부옇게 앉아 글자가 잘 보이지도 않는 팻말. 녹슨 운동기구. 여기저기 버려져 있는 쓰레기. 이해할 수도, 이해할 생각도 없지만, 이 찌는 듯한 여름에 굳이 등산을 나서는 이들도 이곳으로는 올 것 같지 않았다.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아무도 없는 산 중턱 한가운데서 다자이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어지러웠다. 근본을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취한 듯싶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다자이는 나무들이 즐비한 가운데 웬 커다란 종이상자 하나가 버려져 있는것을 보았다. 주위에는 적당한 높이의 나뭇가지를 뻗고 있는 나무가 하나 있었다. 다자이는 열심히 상자를 끌고 와, 나뭇가지 아래에 두고서 그 밑에 주저앉아 올가미를 만들었다. 줄을
모아 잡고, 그 위로 남은 줄을 몇 번 돌려 감자 고리가 하나 생겼다. 남은 줄의 끝을 고리 안으로 찔러 넣고, 휘감아진 부분을 잡아 모은 뒤 반대쪽을 잡아당겨 올가미를 조정했다. 다소 엉성하긴 했지만, 책에서 본 기억을 더듬어 처음 만들어본 것치곤 꽤 괜찮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다.


 다자이는 올가미를 목에 건 채로 상자를 밟고 올라섰다. 가벼운 종이상자는 금방이라도 푹 꺼질 것 같았다. 푸르고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로 비치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제법 굵은 나뭇가지에 줄을 묶는 동안 줄이 눈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춤을 췄다. 줄이 다 묶인 것을 확인하고, 다자이는 빙글 돌아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줄이 단단히 매어졌나 확인하기 위해서 머리위로 길게 드리워진 줄을 잡아당겨 보기로 마음먹고, 두 손을 위로 올려 줄을 잡아당기려고하던 찰나였다. 위태롭던 종이박스의 바닥이 밑으로 푹 꺼졌다.


 "왓, 잠ㄲ..!"


 이건 예상 밖이잖아.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동시에 몸이 아래로 향했다. 목에 충격이가해졌다. 올가미의 크기를 제대로 맞추지 않은 모양인지 책에서 말하던 것과는 달리 단숨에목뼈가 부러지기는커녕 되려 고통스럽기만 했다. 생각하던 것보다는 훨씬 날카로운 통증이었다. 조금 전 순간적으로 급하게 들이켰던 숨이 강제로 내뱉어졌다.


 "끄헉, 커윽,..."


 숨이 턱, 막히면서 몇 초 지나지 않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손으로 목에 감긴 줄을 풀어내려 연신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귀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약한 이명이 들리고 있었다. 다자이는 목의 줄을 풀어내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괴로웠다. 눈을 꽉 감고 있다가 떴을 때처럼 눈앞에 알 수 없는 빛무리들이 시야를 가렸다. 점점 발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어 발버둥 치기도 어려웠다. 의식이 점멸해가고 있었다. 흐릿해지는 시야와 의식을 구태여 붙잡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토록 바라던 죽음이다.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죽음이 도
사리고 앉아 이리오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힘겹게 버둥대는 발치로 누군가가 보이는가 싶더니 총성이 울렸다. 그다음 순간, 다자이는 바닥 뚫린 상자 위로 떨어졌다. 갑작스럽게 폐로 밀려들어오는 공기에 다자이는 칼로 목을 베어내는 듯한 끔찍한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발작하듯 터져 나오는 기침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쿨럭거리는 기침 소리를 매달고 눈에는 기어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생리적인 눈물이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매달려있는 것도 아팠지만 이게 더 아픈 것 같았다. 목의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떨어질 때 부딪힌 엉덩이도 아팠다. 대체 누가 줄을 끊은 거야?

 


 ".... 괜찮나?"


 올가미를 목에서 빼내고서 겨우겨우 기침을 가라앉히고 가쁜 숨만 색색 몰아 내쉴 때쯤 되자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체감상 10분이나 20분쯤 흐른 것 같았다. 그동안 말없이 옆에 서있었나 보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려보니 검은 구두가 보였다. 다자이는 얼굴을 대충 문질러 닦고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웬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뭐야?"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하는 첫소리치곤 제법 당돌한 말이었다.


 "자네가... 콜록,   날, 아니 이 줄을 끊은 사람이야?"


 다자이가 목 주위를 손으로 문지르면서 말을 건넸다. 말할 때마다 목이 아프고 아직도 무언가에 눌린 느낌이라 말을 하기가 거북했다. 가벼운 기침 소리가 잇따랐다.


 "그렇다만."


 남자는 묘하게 침착했다. 손에는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코트 아래로 보이는 왼쪽의 홀스터에는 권총 한 정이 더 꽂혀있었다.


 "뭐가 '그렇다만'인 거야. 내 자살을 방해한 거잖아."


 짜증이 뚝뚝 묻어 나오는 말투로 다자이가 톡 쏘아붙였다.


 "... 내가 여기를 지나가지 않았다면 모를까, 지나가고 있는 도중에 내 눈 앞에서 누군가가
죽는 걸 볼 수 없었을 뿐이다."


 "바보 아냐? 날 구해줄 게 아니라, 그쪽.. 아..."


 "오다 사쿠노스케다."


 남자가 나지막이 제 이름을 말했다. 다자이는 오다의 푸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날 구해줄 게 아니라 눈을 감고 가던 길이나 갔어야지. 오다 사쿠노스케."


 "..."


 "뭐, 좋아. 이미 줄은 끊어졌으니 어쩔 수 없겠지. 오다라고 했나? 내가 죽는 걸 방해했으니 한 가지 도와줘야겠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놨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격의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다자이를 오다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상한 꼬마였다. 흙이 묻어 더러워지긴 했지만 입고 있는 정장은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맞춤형 정장이 틀림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아랫사람 부리듯 거침없이 말하는 태도며 묘하게 어린애답지 않은 분위기, 얼핏 봐도 15살 남짓 되어 보이는 외양을 지니고서 인적 드문 이곳에서 목을 매달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생각을 설득력 있게 만들어주었다. 딱딱한 말투로 오다는 소년의 말에 답했다.

 "언제 봤다고 도와달라는 말을 하는 거지?"


 "방금 내 길고 긴 염원이 이뤄지려던 순간을 자네가 손수 그 총으로 끊어낸 것에 대한 보답을 해줘야할 것 아냐? 난 구해달라고 한 적 없어."


 빨갛게 변해가고 있는 목 주변의 자국을 알고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만약, 오다가 지름길로 빨리 집에 당도하기 위해 이 산을 오르지 않았다면, 그래서 버둥거리고 있는 그를 보지못하고 총으로 줄을 끊지 못했다면 이 소년은 죽었을 것이다. 질식사로 고통스럽게. 그런데 이 소년에게는 그게 염원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오다는 자살을 간절히 바라는 자의 오래된 소원을 엉겁결에 망쳐버린 모양이다.


 "보답이라고 해봐야 얼마 걸리지도 않을 거야. 몇 분, 아니 자네가 잘만 해준다면 몇 초 내로도 끝날 수 있는 일이니까."


 답을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오다에게 다자이가 툭, 던지듯이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날 죽여줘."


 간결하기 그지없으면서도 정신 나간 말이었다. 방금 죽다가 살아난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할 말인가? 오다는 약간의 황당함을 느끼면서 그 말에 대꾸를 해줘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3초쯤 하고서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건 안 된다."


 "왜? 아주 간단해. 오다 사쿠노스케. 자네 손에 들고 있는 그 총으로 내 머리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되는거야. 이리저리 흔들리는 줄도 맞추는데 설마 내 머리도 못 맞추란 생각은 하지 않거든. 확인사살로 가슴에 한 번쯤 더 쏴주면 더 좋고. 한...세 발 정도?"


 다자이가 손가락을 세 개 펼쳐 보이며 말했다. 오다는 그 순간에 거의 확신했다. 이 아이는 분명 뒷 세계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돼 있는 사람이라고. 오다 자신의 신념과는 별개로 이 소년을 죽여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미안하게 되었군. 그건 곤란하다."


 다자이는 남자의 단호한 대답에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지금쯤이면 나카하라가 다자이의 행방을 눈치채고 이 잡듯 뒤지고 다닐 것이 뻔했다. 벌써 귓가에 울리는 그 목소리가 신경을 긁어댔다. 어디선가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간단한 일이잖아. 몇 초만 투자해볼 생각은 없는 거야?"
 눈살을 찌푸리며 건넨 말에 오다는 딱 잘라 말했다.


 "없다."


 "마피아잖아. 그러니까 괜찮을 거 아냐. 어차피 여기는 사람이 잘 오지도 않아서 몇 초 투자한 다음 재빨리 몸을 피하면 경찰에 연루될 문제도 없을 거야."


 오다는 다자이의 말에 움찔, 하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엄청나게 놀라고말았다. 이 아이, 마피아의 사람이던가?


 "그걸 어떻게.."


 "아까 봤어. 총을 꺼내는 모습을. 한두 번 다뤄본 솜씨가 아니더군. 거기다 손이 거칠어. 굳은살이며, 흉터가 험한 일을 주로 해온 손이고, 덧붙이자면 총잡이의 손이지. 총을 다룰 수 있는 건 경찰 아니면 뒷세계 사람 뿐인데 보아하니 야쿠자는 아닌 것 같고... 거기다 여기 주변은 최근에 포트 마피아가 세력을 재정비하면서 싹 정리했어. 그러니 마피아일 거라고 생각한거야. 경찰이라면 벌써 경찰에 연락을 취하고 난리가 났을 테니 당연히 아닐거고. 포트 마피아 조직원들이 입고 다니는 검은 정장도 아니니 직급도 없는 말단일 테지."


 미리 준비해놓기라도 한 듯 줄줄 읊어내리는 말에 오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 짧은 순간에 그걸 관찰했다는 말인가. 순간적인 관찰과 판단력이 귀신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다자이가 그렇게 말해도 오다는 그를 쏠 생각이 없었음 또한 사실이었다.


 "...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안될 것 같군."


 "왜 자꾸 안 된다 안 된다 타령만 하는 건가? 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난 지금 내 죽음을방해한 자에게 합당한 대가를 받으려는 것뿐이야."


 "나는... 이 총을 사람을 죽이는 데에 쓰지 않는다."


 오다가 총을 갈무리해 홀스터에 꽂아 넣었다.


 "마피아라며!"


 다자이가 오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따지고 들었다.


 "마피아에도 여러 가지 사람이 있는 법이지."


 오다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미 귀가 따갑도록 들은 말이다. 그때마다 오다는 같은 대답을고수해왔다. 14살, 비가 오던 그 날 이후 그 남자가 건넨 말 한마디에 일을 관두고 이곳 저곳 전전하다가 끝내는 마피아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다는 결코 총을 들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포트 마피아의 잡일 처리꾼에 지나지 않는 대접을 받아도 오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사람을 죽인 손으로는 사람을 쓸 수 없다. 그 이후로 몇 년이 지나도록 오다의 뇌리에 가시처럼 박혀있는 생각이었다.


 "....."


 오다의 대꾸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다자이는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깔아 바닥을 바라보았다. 옆에는 끊어진 줄이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다자이는 줄을 집어 들었다.


 "좋아. 그럼 이 줄을 다시 묶는 걸 도와줘. 올가미 정도는 만들 줄 알지?"


 다자이가 오다에게 줄을 건네었다.


 "그거야 어렵지 않다만."


 오다가 줄을 받으려 손을 내밀자, 다자이가 손을 뒤로 쏙 뺐다.


 "... 자네, 혹시 바보야?"


 "?"


 오다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손을 이쪽으로 내민 채였다.


 "올가미를 도로 묶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정도는 알 거 아냐."


 "올가미는 여러 번 묶어봐서 네 것처럼 허술하게 묶진 않는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눈치가 좀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자네가 묶어준 걸로 내가 다시 목을 매달면?"


 "내 눈 앞이라면 다시 이 총을 쓰겠지."


 오다가 총이 꽂힌 홀스터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귀찮고 성가신 사내다. 오늘 자살하기는 글렀다. 가까운 곳에서 귀 따갑게 울어대던 매미가 잠시 잠잠해졌다.
 "눈 앞이 아니라면?"


 "상관없다."


 눈치 없는 데다 이상하기까지 한 사내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방금 구해놓고 눈앞이 아니라면 상관없다니 보통은 이런 식으로 말을 안 하지 않나? 거기다 그 말에서는 정말이지 한 점의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자이는 아주 가느다랗고 약한 흥미를 느꼈다.

 


 "어딘갈 가던 길 아니었나? 이제 날 구했으니 가던 길이나 마저 가는 건 어때? 몇 초도 투
자해줄 생각이 없다면 말이야."


 "음..."


 "뭘 망설이는 거야? 언제 면식이 있었다고 이렇게 신경을 써ㅈ-"


 "실례했군. 그럼 이만."


 오다는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아서서 제 갈 길을 갔다. 다자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조금 이상한, 쓸데없는 정의감에 넘쳐나는 자라고 생각하고 예상했던 것과는 판이한 방향으로 대화가 아주,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끝나버려서 황당하기까지 했다. 다자이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응
시하다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자네."


 다자이가 오다의 발걸음을 잡아 늘어뜨리려는 수작을 부렸다.


 "?"


 오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오다 사쿠노스케다."


 "사쿠노스케 라..."


 다자이가 입 안에서 이름을 한 번 더 굴리면서 곱씹었다. 사쿠노스케.
 "몸조리 잘했으면 좋겠군. 병원을 가보는 게 나을 거다."


 오다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제 갈 길을 갔다. 다자이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줄을 손에 둘둘 감고 일어섰다. 몸이 휘청거렸다. 뒤의 나무에 등을 기대자 다시 매미가 울어대기 시작했다.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에 옷이 환하게 빛났다. 하늘은 파랬고 중간중간 보이는 구름은 갓 빨아 아침햇살 아래서 말린 이불처럼 새하얗게 떠 있었다. 푹푹 찌는 더위속에서 자살을 시도한 망할 놈을 찾아 밖으로 나온 나카하라가 다자이를 찾아낸 것은 그로부터 40분 정도 지났을 때의 일이다. 다자이는 미친놈처럼 혼자서 히죽히죽 웃으면서 나무 아래에 주저앉아있다가, 더위에 빨갛게 물들어 헉헉대는 나카하라의 얼굴을 보고 폭소를 터뜨렸다. 나카하라는 다자이의 목에 새겨진 선명한 줄 자국을 보고, 그리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해맑게도 처웃는 걸 보며 저 새끼는 이 세상 둘도 없는 미친놈이라는 생각을 또 한 번 해야만 했다.

 


 03.

 


 다자이는 그 길로 나카하라에게 온갖 욕을 들어먹으며 포트 마피아로 돌아왔다. 츄야, 저기 울어대는 매미보다 자네가 더 시끄러운 것 같아라고 했다가 한 대 쥐어박힐 뻔하기도 했다. 나카하라는 보스에게 보고하러 가겠다며 방을 나서기 전 침대 위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다자이에게 작은 냉장고에서 물병을 하나 꺼내 던져주었다.


 "츄야, 지금 걱정해주는 거야? 징그러워~"


 "아니, 존나 고생했을 니 목에 대한 애도다."


 ".... 츄야, 츄야가 걱정도 할 수 있었어? 그 머리가... 장식이 아니었구나! 진짜 다행이다!"


 "허구한 날 쥐새끼마냥 나가서 자살이나 하는 니놈 새끼가 할 소리냐?"


 "내가 뭐 어때서? 낙하산으로 코요 누님 직속부대에 추락한 나카하라 츄우야보다는 내가 훨씬-"


 나카하라가 잔뜩 인상을 구기면서 물병을 다시 채갔다.
  "씨발, 말을 말아라 말을. 개 같은 새끼."

 


  문이 쾅 소릴 내며 닫히고, 구석에 있는 냉장고가 작게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다자이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입안으로 이름을 곱씹었다. 사쿠노스케. 오다 사쿠노스케.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포트 마피아의 말단이라고 순순히 말했으니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자이는 그를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 몸을 뒤로 조금 젖혔다가 반동으로 일어났다. 오다 사쿠노스케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

 


  "히로츠씨."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중년 남자는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고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담배는 구둣발로 짓이겨 꺼버렸다.


  "무슨 일로...?"


  다자이는 히로츠가 질문하자 기다렸다는 듯 곧장 대답했다.


  "사람 하나를 좀 알아다봐줄 수 있어?"


  히로츠는 의아한 낯으로 다자이를 바라보았다.


  "그야, 어렵지는 않습니다만..."


  "이름은 오다 사쿠노스케. 나이는 그리 많은 것 같지 않아. 기껏 해봐야 20살 정도? 그리
고..."


  히로츠가 이름을 듣자마자 아, 하고 뜻 모를 탄성을 내뱉었다.


  "히로츠씨, 아는 사람이야?"


  이번엔 다자이가 의아한 낯을 했다.
 "아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이름은 들어본 적 있습니다."


 "어떻게?"


 "말단이라고 하던데,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더군요."


 이미 유명한 모양이다. 다자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하고 호기심 많은 15살 꼬마 연기를 좀 더 해보기로 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아?"


 "포트 마피아에 들어온 지는 얼마 안 되는 모양입니다. 사격실력도 괜찮고… 실력만 놓고 보면 괜찮은 이인데 사람을 죽이려고 들질 않아서 일에 차질이 빚어지게 한 것이 몇 번이나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잡일만 처리하고 있다
고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 혹시 좀 더 알아봐 줄 수 있어? 예를 들어... 음...과거라던가? 다른 곳도 아니고 마피아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게 된 연유라던가?"


 "알겠습니다."

 


 다자이는 히로츠의 방을 나가 제 방으로 다시 돌아간 뒤 침대 위에 발라당 누워 시간을 때웠다. 나카하라가 보스에게 보고한답시고 제 딴에는 열심히 만들어둔 엉망진창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찢어서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날리는 것은 30분도 채 되지 않아 흥미가 떨
어졌다. 아까 츄야가 채 간 물병이 있으면 좀 더 재미있었을 거라며 투덜대고 아쉬워하고 있을 때, 히로츠는 방으로 찾아와 다자이에게 갈색 봉투에 잘 갈무리되어 담긴 몇 장 되지도 않는 서류를 건네주고 조용히 나갔다. 다자이는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오다 사쿠노스케.   20세. 포트 마피아에 들어온 지는 3년. 꽤 됐잖아? 그런데 아직도 말단이라구? 아..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그랬지 참.


 다자이는 서류를 대충 넘겨보았다. 서류는 총 3장. 그리 많지도 않아서 서류라고 할 것도 없었다. 어디에 사는지, 혈액형이 뭔지, 키는 얼마인지, 몸무게는 얼마인지 같은 기본적인 정보를 낱낱이 적어놓은 첫 장을 넘기자 꽤 재밌는 내용이 두 번째 장 중간부터 마지막까지 쭉 적혀 있었다. 꽤 빼곡하게 적혀 있긴 했지만 양 자체는 많지 않아서 읽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자이는 다 읽은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 마피아라..."
 푹신한 의자에 파묻힐 듯이 앉아 손으로 책상을 톡, 톡 두드리던 다자이가 벌떡 일어섰다. 아주 오래간만에 재밌는 일이 생긴 참이었다. 안타깝게도 창 밖으로 땅거미가 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자이는 내일로 그 일을 미루기로 했다.

 


 04.

 


 오다의 집은 일전의 그 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때 오다는 집에 가던 도중이었나 보다. 지금 다자이의 눈앞에 보이는 단출한 하얀색 2층 건물의 1층이 오다의 집이었다. 사람이 있나 싶어 다자이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나무 그늘에서 집을 살펴보기로 했다. 인기척은 없었다. 어디 나가기라도 한 건가 하고 생각하던 다자이 어깨 위로 목소리가 떨어졌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다자이는 내심 놀랐지만, 태연자약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오다를 친근하게 불렀다.


 "여어~ 사쿠노스케."


 "..."


 오다는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지만 얼마 전에 봤던 이상한 꼬마가 왜 제 집 앞에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그때 못 들어줬던 부탁을 지금은 들어줄 수 있나 싶어서 말이야."

 


 예전부터 오래 알고 지내온 사람인 마냥 이름을 불러대는 자태가 참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오다는 황당함을 느꼈다. 방긋방긋 웃는 낯을 앞에 두고 욕지거릴 할 수도 없거니와, 오다는 함부로 욕을 입에 올리는 자 또한 아니었으니, 얌전히 대답해주고 얼른 가길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왜.."


 "오다 사쿠노스케. 한때 암흑가에서 소문이 자자하던 어린 살인 청부업자. 무슨 연유에선지 갑자기 살인을 관두고 잠수했었다지?"


 "...!"


 오다는 귀를 의심했다. 저 정보를 어떻게 아는 건지, 대체 뭐 하는 녀석인지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앞으로 나올 이야기가 그리 괜찮은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사람을 죽이지 않는 마피아라... 지나가던 개가 웃겠어, 사쿠노스케."


 느릿하게 이름을 끊어 부르는 목소리가 질척거렸다.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다자이가 새까맣게 죽은 눈으로 오다를 올려다보았다. 방긋방긋 웃던 얼굴에는 어느새 비웃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파란 하늘에 떠 있던 구름이 해를 가리자 삽시간에 주위가 가라앉았다. 매미도 거짓말처럼 울음을 뚝 그쳤다. 그때랑 비슷했다. 다자이가 오다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암흑가에서 최고의 살인청부업자로 명성이 자자하던 오다 사쿠노스케! 사람을 죽이지 않는 마피아가 되다!' 얼마나 멋진 제목이야! 안 그래?"


 "..."


 오다는 총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집 근처 슈퍼가 문을 닫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장을 보러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으니 현 상황에서 오다에게 총은 없었다. 낭패였다.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방심할 수 없다. 눈앞의 소년은 능히 그래야 하는 인물이었음을 오다는 방금 전에 깨달았다.


 "오다 사쿠노스케."


 다자이가 오다의 이름을 부르면서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오다는 왼쪽 발을 뒤로 내디뎠다.


 "날 죽여줘."


 다자이가 속삭였다.


 "누차 말하고 있지만 그건 안된다."
 "아~ 그 잘나신 신념 때문인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는?"


 "그래. 난 이름도 모르는 상대의 부탁을 들어줄 만한 사람이 아니다."


 오다는 재빨리 다자이를 위아래로 살폈다. 다자이의 손에 총은 없었다. 그렇지만 너무 가까웠다. 칼이라도 들고 있다면 바로 찔릴 거리였다.


 "이미 시쳇더미 위에서 살아온 인간 아닌가? 손은 이미 피로 더럽혀져 있을 텐데, 이제 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갑자기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범 시민이라도 될 셈인 거야?"


 다자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씨익 웃어 보였다. 섬뜩한 웃음이었다. 오다는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위험을 감지했다. 오다의 표정에서 약간의 변화를 읽은 것인지 다자이는 더욱더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사쿠노스케. 다 소용없고 부질없는 짓이야. 자네는 이미 사람을 죽여봤어. 그것도 아주 여러 번. 지금 그걸 관뒀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지."


 다자이가 오다의 손목을 잡아 왔다. 여전히 눈은 마주친 채였다. 사위가 고요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날 죽여줘, 오다 사쿠노스케.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난 들어줄 생각이 없다.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아. 이만 가줬으면 좋겠군."


 오다는 다자이의 손을 뿌리쳤다. 오다의 생각에 변화는 없었다.


 '그렇다면 네가 직접 써라.'


 아직도 귓가에 그 목소리가 생생했다. 소설을 쓰는 것은 인간을 쓰는 것. 오다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살인을 관둔 이유였다. 이상한 꼬마가 아무리 무어라 해도 그의 마음에 변화가 생길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오다가 망설임 없이 다자이를 지나쳐 걸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오다는 머릿속으로 영상을 보았다. 소년이 뒤쪽에서 총을 빼 들었다. 그 상태로 곧장 오다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리는가 싶더니— 갑작스레 영상이 끊겼다. 오다는 아찔함을 느꼈다. 이능력이 제대로 발동되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이게 무슨...!'


 붕대 감긴 하얀 손이 오다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오다는 재빨리 팔을 쳐냈다. 다자이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일신의 안위가 걸린 일에도 그 얄팍한 신념을 관철하게 될까?"
 영상에서처럼 다자이는 뒤쪽에서 총을 빼 들고 오다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손에 둔탁한 충격이 왔다. 모리가 총을 쏘는 법을 가르쳐주긴 했지만, 사람에게 쏴보기는 처음이었다. 제법 정확하게 조준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다는 다자이가 총을 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라도 한 듯 자신이 총을 겨냥한 반대쪽로 위치를 옮긴 후였다. 아하.


 "....이능력자구나? 미래를 보는."


 오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재밌는 남자였다. 호기심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성이 자자했을 만도 하네. 미래를 보는 이능력자라..."


 "다 옛날 일이다."


 오다는 경계하기만 할 뿐, 반격해올 기세는 아니었다. 무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서서 다자이를 쳐다보며 잠자코 대꾸해주기만 했다.


 "하! 방금 좀 웃겼어. 사쿠노스케. 자네가 이제 와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실이 없어지기라도 한다고 누가 그랬나? 아니? 그 사실은 자네가 사람을 죽이지 않는 마피아로서 이름이 알려질 때마다 마음 한편을 무겁게 짓누를 테지."


 어떻게든 이 남자의 신념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 마피아 같은 건 어불성설이다. 거기다, 이미 사람 수십 명을 돈 받아 죽여놓고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야? 어떻게 해서든지, 그 웃기지도 않은 말을 산산이 깨부셔 눈 앞에 늘어놓고 비웃어 주고 싶었다. 다시 사람 피를 손에 덧입혀주고 싶었다. 자, 이거 봐. 네 하찮은 신념의 말로야 이게.


 "73명. 73명이야. 자네가 죽인 사람들 말이야. 개인을 살해한 건 57명. 일가족 모두를 몰살한 건 총 5번."


 오다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다자이는 조금 더 입을 놀려보기로 했다.


 "기껏 해봐야 열셋 정도 될까 한 살인 청부업자에게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그자들의 눈빛을...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다시 떠올려봐. 황망함, 분노, 당혹스러움을 가득 담은 그 눈빛을. 점점 빛을 잃어가는 눈동자 안에 마지막으로 담겼던, 자네 얼굴을."


 죄책감을 자극하는 것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다자이가 속삭이다시피 하며 줄줄 내뱉는 말에 오다는 여전히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표정 변화라거나, 손이 떨린다거나, 숨이 가빠진다거나 하는. 그 일반적인 변화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약간의 초조함을 느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놓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마피아라는 우스꽝스런 입장을 자처하다니!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


 오다의 간결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다자이가 멈칫했다. 잘못들은 건가?


 "....?"


 잠시 말이 끊긴 다자이의 시선을 오다는 구태여 피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따름이다.


 "내가 사람을 죽이지 않는 건 지극히 내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다. 다 옛날 일이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야. 의뢰를 받아 사람을 죽였고, 돈을 받았다. 그리고 5년 전에 그 일을 관뒀다. 그뿐이다."


 다자이는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재밌는 걸 발견했다.


 "그래. 그리고 내 이능력은- "


 오다는 또 한 번 영상을 보았다. 영상 속에서 다자이가 오다에게 다가왔다. 산책하러 나가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철컥, 금속성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배에 총구가 와 닿았다.

그리고, 아까 전처럼 영상이 끊겼다.


 "이능력무효화지. 그뿐이야."


 '그래서 아까도 영상이 끊긴 거였나...!'


 다자이가 오다의 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오다의 머릿속에서 위험 감지 신호가 세차게 울려댔다. 다자이의 다른 손은 벌써 총을 꺼내 들고 있었다. 검은 총신이 햇빛을 받아 빛났다. 오다는 총을 들고 있는 쪽의 다자이의 손목을 낚아채고 총을 뺏는 대신 다자이를 등 뒤의 나무로 밀어붙였다. 총구를 바깥으로 돌리게 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는 순간적인 판단 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다음 순간, 총성이 울렸다. 옳은 선택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오다의 배에는 총구멍이 났을지도 모른다.


 다자이의 양 팔을 위로 향하게 손목을 꽉 잡고 밀어붙인 그 순간에서야 오다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다자이의 팔에는 하나도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이끌리는 대로 몸을 내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나무에 세차게 부딪혀 방아쇠를 당긴 후, 손에서 총을 놓친 다자이는 오다의 행동에 놀랐는지 눈을 깜빡깜빡하며 저를 제압한 오다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고 곧 웃음을 터뜨렸다.
 

 더없이 맑은 웃음소리였다. 오다는 정말로 즐거운 듯 웃는 다자이를 보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 전까지의 긴박한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다시금 매미가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파. 아프다구. 이 손 좀 놔줘."


 다자이가 칭얼거렸다. 오다는 순순히 손목을 놔주었다. 다자이는 총을 들고 있던 오른쪽 손목이 더 아팠던 건지 손목을 만지면서 신나게 떠들어댔다. 오다는 그런 다자이가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아야... 아무리 목숨을 위협했다지만 너무 우악스러운 거 아냐? 누가 전직 살인청부 업자면서 마피아 아니랄까 봐... 어차피 저 총에는 탄창도 들어있지 않았다구! 애초에 하나만 남기고 다 뺏단 말이야."


 "... 그런.. 거였나."


 분명 잘못한 쪽은 멋대로 찾아와 시비를 걸고 뒷조사까지 해가며 떠들어대고 목숨까지 위협한 저쪽인데 꼭 오다가 잘못한 기분이었다.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오다는 제 안에 다자이를 가둔 것처럼 되어버린 꼴이 보기에 뭣 하다는 것을 깨닫고 뒤로 물러났다. 다자이는 그걸 보고 또 유쾌하게 웃는다.


 "자네, 주변인들에게 트집 잡아야 할 때에도 그냥 넘어간다는 소릴 많이 듣지?"


 그랬던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의뢰인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았다. 오다는 아마도.라고 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응~ 그렇단 말이지..."


 다자이는 오다를 빤히 쳐다보다가 그 주위를 천천히 빙글빙글 돌면서 뜻 모를 시선을 보냈다. 한 바퀴를 다 돌아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자, 다자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촬영을 모두 끝마치고 마무리가 될 슬레이트를 치는 것처럼 경쾌하게 손뼉을 쳤다.


 "좋아! 사쿠노스케. 아니지…. 오다사쿠!"


 "오다사쿠? 날.. 부르는 건가?"


 "그럼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달리 오다사쿠라고 부를 만한 다른 이라도 있나?"


 "그렇군."
 오다는 수긍 했다. 다만 눈앞의 소년이 묘하게 신나 보이는 것이 의아할 뿐이었다. 뭐가 재밌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오다는 방금 깨달았다. 오다는 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소릴 해대는 소년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뭣 때문에 수고스럽게 뒷조사까지 해가며 자신을 찾아왔는지도 당연히 모른다.


 "그나저나 오다사쿠, 지금 자네가 아까 거칠게 잡아 누른 손목이 너~무 아파! 이건 어떻게 해줄 거야?"


 다자이가 쫑알쫑알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아까 전의 서늘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저런 모습을 보니 어린애가 따로 없다. 오다는 그렇게 생각하며 질문을 던졌다.


 "… 이름이 뭐지?"


 “응?”


 “이름. 네 이름 말이야.”


 “내 이름? 내가 안 가르쳐줬었나?”


 소년의 눈이 커졌다. 정말로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제 처음 만난 이후로 죽여달라고 두 번 요청하고 내 이름을 묻고…. 내게 총을 겨누긴 했지.”


 다자이가 애매한 웃음소릴 흘렸다. 저런 말을 하는데 거기서 악의 한 점 느껴지지 않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다.


 “알고 싶어? 이것 참.. 영광인데~”


 오다는 아무 말 않고 다자이를 쳐다보았다. 시답잖은 농담을 적절히 받아쳐 줄 만한 재치는 그에게 없는 수많은 것 중 하나였다. 다자이는 오가는 말 하나 없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살피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넌지시 이름을 말했다.


 “다자이.”


 “다자이?”


 “다자이 오사무.”


 “그게 네 이름인가?”
 다자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다는 머릿속에 넣어둔 수많은 이름들을 훑었다. 그런 이름은 없었다.


 “다자이.”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다자이가 오다를 쳐다보았다. 오다가 무어라 채 하기도 전에 그가 선수를 쳤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냐고 묻고 싶은 거지? 생판 모르는 남인데 말이야.”


 오다는 간단한 대답 대신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바람이 불었다. 다자이는 빙글 돌아섰다. 어깨 위의 정장 코트가 바람에 흔들렸다.


 “재밌어 보였거든.”


 “너는… 재미로 사람을 죽이려하나?”


 “자네는 돈 받고 사람 죽인 전적이 있잖아.”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렇군.”


 재미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돈 받고 죽이려 하는 게 같다고는 느끼지 않았지만, 맥락은 비슷했으니 오다는 구태여 반박하지 않았다.


 “난 질문에 답해줬어.”


 오다는 그 말을 듣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자이를 쳐다보았다. 분명 다자이는 오다의 질문에 답해줬다. 내가 답해야 할 질문이 있던가? 오다는 좀 전의 대화를 되짚어보았다. 오다가 별다른 답을 않자 다자이는 다시 빙글 돌아 오다를 마주 보았다. 붕대로 가리지 않은 쪽의 검은 눈이 까맣게 빛났다. 약간 인상 쓴 걸로 봐서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아까 말했잖아!”


 “그래. 네 이름을 말해줬지.”


 “아니- 그전에 말이야.”


 그 전?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자이는 얼마 정도 더 기다려주다가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오다는 다자이가 이름을 가르쳐 준 것 전에는 다자이가 저를 총으로 거짓 위협했던 것 말곤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다자이가 먼저 말을 꺼낸 걸 고맙게 생각했다.


 “내 손목이 자네 때문에 아프다구. 어떻게든 해줘야 할 것 아냐!”


 다자이가 총을 들고 있던 손목을 다른 쪽 손으로 가리켰다. 오다는 그제야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뱉어냈다. 약간 억울한 감도 없진 않았다. 애초에 '재미있어 보였다'라는 단순하고 어이없는 이유로 찾아와서 분탕질을 치지 않았으면 될 일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아까 잠시 겪은 바로 오다는 다자이가 이런 설명을 한다고 해서 수긍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냥 원하는 대답을 해주기로 했다.


 “내가 어떻게 해줘야 하지?”


 “최근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발견한 좋은 곳이 있어.”


 다자이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오다는 자신보다 키가 한참 작은 다자이를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오다의 어깨에 닿기에는 조금 모자란 키였다.


 “좋은 곳?”


 “바(Bar)야. 바 ‘루팡’.”


 들어본 적 있어? 하고 물어오는 목소리가 즐거운 빛을 띠었다. 루팡이란 이름을 가진 바는 오다가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오다는 고개를 저었다.


 "바라면… 술을?"


 "정답. 같이 갈 사람이 없었거든. 자네라면 같이 가도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다자이가 선심 쓰는 듯한 말투로 답해왔다.


 "그렇군."


 "바다처럼 넓은 아량을 베풀어서 5잔 정도로 퉁쳐줄게."


 오다의 대꾸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자이는 오른손을 들어 하얀 손가락을 다섯 개 쫘악 펼쳐보이면서 장난스레 덧붙였다. 유리잔에 동그란 얼음을 띄운 위스키 맛이 궁금했거든.


 "하루에 5잔을 다 마시겠다는 건가?"


 "설마."
 시간 날 때 부르면 한 잔씩 사달라는 거지. 다자이가 웃었다. 손목을 아프게 한 값인가? 그럼. 이 정도면 싼 거라구. 그렇군. 짤막한 대화가 오간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도 그 위치를 바꾸어 내리 앉는다. 다자이가 나무 그늘 밖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선 한 마디 툭, 던졌다.


 “호기심이야."


 오다는 다자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오다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때, 다자이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안 올 거야? 사주겠다며! 지금? 지금이 아니면 언제 사주려고? 알겠다.


 오다가 다자이의 뒤를 따랐다. 나뭇잎 사이로. 칙칙한 건물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푸르렀다. 뭉게구름이 떠나녔고, 쏟아지는 밝은 햇빛 아래 술집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짧게 드리워졌다. 화창한 초여름 날씨 속에서 매미 우는 소리가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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