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 류아 (@Rua_BSD) / 오다자
오다사쿠를 처음 만난 건, 그러니까. 손목에 새겨져 있던 100이 99가 된 건, 여름의 어느 날 오후였다. 그때는 아직 오다사쿠를 몰랐을 때. 괜히 손목 쪽에 새겨진 문자가 신경 쓰이던 여름이었다. 언제쯤 파트너를 만날까, 운명이라는 거 믿지는 않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 손목에 내내 붕대를 감고 다녔었는데, 그날 하필 붕대가 떨어져서 사러 나선 길이었다.
시장 거리는 오랜만이라, 괜히 이리저리 둘러보며 걸어갔다. 예전보다 신기한 물건이 늘었네. 서점 앞을 기웃거리다가 왜인지 완전자살독본과 비슷한 책 디자인을 발견해서, 앞뒤 보지도 않고 서점 앞으로 홀린 듯 가던 길이었다. 눈길을 책에 고정했던 탓일까, 옆쪽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넘어져서 멀뚱히 앉아있던 나에게 낮은 중저음이 들려왔다. 듣기 좋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푸른 눈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눈을 빠안, 마주치자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는 표정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괜찮습니다."
읏차, 자리에서 일어나 묻은 것들을 털고 있자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지나가길래, 그냥 음, 하고 보낸 게 다였다. 손목의 숫자가 줄어든 걸 본 건, 그날 오후 집에 가 붕대를 고쳐 감을 때였다. 99, 처음으로 줄어든 숫자에 누구랑 스쳤더라, 싶어 기억을 되짚어보다 그 눈을 기억해냈다. 누구일지도 모르는 사람, 그래도 그 사람이라면 어떨까, 하는 약간의 기대감이 들었다. 그렇게 첫 만남. 두 번째는, 그래. Rupin, 에서였다.
늘 즐겨가던 술집이라, 그날도 여느 때처럼 구두를 터벅거리며 그 길로 향했다. 갈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간판에 전기 좀 고치지. 반짝이다 꺼졌다, 하는 불빛을 몇 번 바라보다, 계단을 내려갔다. 정확히, 17개. 내려가 문을 열자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어두운 불빛, 냄새까지. 매일 같아서, 그래서 이곳을 좋아했다. 바텐더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이는 모습에 마주 미소 짓고는, 자리에 앉았다. 바텐더 앞의 가운데 자리. 그 자리가 항상 앉던 자리였다. 술잔에 담길 얼음을 깎는 소리가 기분 좋았다. 잠시 눈을 감고 소리를 듣고 있었더니, 곧 달칵, 하고 잔이 앞에 내왔다. 고마워, 작게 중얼이고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잔을 기울이자 얼음이 입술에 닿았다. 차갑다. 한 모금 마시자,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술이 썼다. 이제는 익숙한 쓴 맛이었지만. 눈을 깜빡, 잔을 내려놓고 노래를 들으며 멍하니 있던 중이었다. 달칵, 보통 이 시간 때에는 잘 안 열리는 입구의 문이 열렸다. 키가 큰 남자의 그림자, 누구지. 시선을 돌리자 푸른 눈, 저번에 봤던 푸른 눈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 자연스럽게 의문스러운 소리가 나왔다. 당시에는 누구였는지 술기운 탓에 기억하는 데 시간이 걸렸었다. 오른쪽 옆에 오다사쿠가 앉고, 술이 다시 나올 때쯤 깨달았다. 깨닫고 나서 바로 손목을 보자 98, 이 되어있어서 그제야 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쪽도 깨달았을까, 시선을 던졌지만,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라서 괜히 섭섭했다.
"저기,"
나 알아요?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바라봤다. 무슨 소리일까, 의아해하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서 재미있었다. 흐응, 괜히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나 알아요?"
"... 모른다."
정말? 난 아는데. 눈이 마주쳤다. 누군지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음. 말해줄까, 얼굴에 절로 미소가 드리웠다. 시선을 마주치자 영 불편한지, 잔을 들어, 마시는 게 좀 미안했다.
"아직 숫자 못 봤나 보네."
"숫자?"
손목을 들어 확인하는 게, 진짜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으음. 슬쩍 본 손목에는, 예상대로 3이 새겨져 있었다. 설마 이래도 모르지는 않겠지, 싶어서 바라보자 다행히도 무슨 일인지 알았는지, 놀란 표정이 보였다. 설마, 하고 중얼거리는 모습에 방실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나."
그의 눈이 당황한 듯 또르르 굴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의외로 즐거웠다. 눈을 마주치고 가만있노라니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똑같이 마주쳐왔다. 서로 빠안 바라보는 사이에 살펴본 얼굴은, 예상보다 나이가 있어 보였다. 수염이 나 있었고, 저번에 부딪혔을 때 본 걸로는 키도 컸기 때문에.
"그쪽, 이름은?"
"오다 사쿠노스케."
"나이는?"
"22세."
꼬박꼬박 다 대답하는 게 귀여웠다. 그런데 22.. 22면, 나랑 5살 차이..? 근데 파트너, 라? 생각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약간 의아했다.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자, 똑같이 바라보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앗, 슬쩍 바라본 손목의 숫자가 50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럼 확실히 이 사람이 맞다는 건데. 새삼스럽게 운명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메웠다.
"오다사쿠, 직업은?"
내가 멋대로 부른 호칭이 기분 나쁜지, 미간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솔직한 사람이구나. 나랑은 안 어울리는, 이런 사람이 내게 어울릴 리 없었다. 파트너라니, 뭔가 잘못됐어.
".. 마피아의 말단이다."
말단.. 마피아의. 무심코 잘못 들은 것인지 말을 곱씹어보다 얼었었던 것 같다. 그야, 이렇게 솔직한 사람과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마피아 내에서 본 기억이 없었으니까. 물론 말단이라니 그랬겠지만, 뭐. 다시 훑어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문득 머릿속에 스친 건, '살인하지 않는 마피아'. 머리로만 생각한 줄 알았는데 입 밖으로 뱉었는지, 옆에서 물음이 들려왔다.
"그쪽도 마피아인가."
"응, 다자이 오사무, 라고 하는데. 알아?"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마피아라면 간부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눈을 마주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건 그냥 이름을 듣고 납득한 사람의 표정이었기에, 대체 모리씨는 부하들에게 간부의 이름도, 얼굴도 알려주지 않고 뭐하는 걸까. 나중에 길 가다가 마주쳤는데 시비 걸거나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한숨만 나왔다. 내일 일러둬야지.
".. 다자이. 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응, 편하게 해. 어차피 이제 자주 마주칠걸."
운명이 파트너라잖아, 운명 따위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서도 괜히 신경 쓰이는걸, 오다사쿠. 술잔을 가만 기울이자 반쯤 녹은 동그란 얼음이 기울임에 맞추어 병에 부딪혀 맑은소리를 냈다. 동그란 얼음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는 건, 버릇이었다. 버릇에는 이유가 있다고들 하는데 전혀 이유를 모르겠어서. 그냥 더러움이 섞이지 않은 투명함과, 맑은소리가 마음에 들어서 가 아닐까. 아니면 더 단순한 이유일지도.
"자주 마주칠걸..? 어째서지."
"그야, 파트너잖아? 내가 알기로는 파트너는 자주 함께 하잖아?"
그러면서 나카하라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카하라와는 그렇게 사이도, 성향도 안 맞으면서 파트너라는 이름 때문에 자주 함께 다녔으니까. 그래서 그때까지만 해도, 운명의 파트너라는 손목의 숫자 의미가, 단순히 파트너라고 생각했다.
오다사쿠가 죽기 전까지.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는 건, 무척이나 끔찍했다.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기억을 더듬어봤다. 분명 오늘로부터 49일 전이였지.
그날, 그 무도실에 도착했을 때. 쓰러진 오다사쿠를 본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그 순간까지도 유지되는 내 태연함의 연기에 환멸이 날 정도로. 입으로는 네 이름을 부르며, 뛰어갔다. 이렇게까지 동요한 건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어야 했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며 뻗은 손에 허공만이 잡혔을 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오다사쿠는 이번에 죽겠구나, 하고. 확인한 상처가 치명상이라는 걸 알았을 때 확실하게 알았다. 그래도, 그래도. 눈물을 참느라 마지막인 상황에, 욕만 뱉어냈다. 바보라고, 몇 번이고. 해두고 싶은 말이 있다고 입을 열었을 때, 살 수 있다는 건 아주 적은, 숫자로 따지면 한 0.00001% 정도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그런 말을 해서 시간을 줄여버렸다. 대화할 시간을, 함께할 시간을. 그래도 그 이후에 들은 말은 무척, 무척이나 소중한 말이었다. 그때 오다사쿠는 내가 49일 후 죽는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았지만. '사람을 구하는 쪽이 돼라.' 될 수 있다면 함께 했으면 좋았을걸. 왜 먼저 가버린 거야, 원망인지, 아니면 그냥 쌓인 슬픔인지. 울분을 토해내려는 걸 참았다. 네 친우니까. 하는 말이, 미치도록 아프게 다가왔을 때. 그때 알았다. 운명의 파트너는, 그냥 파트너가 아니구나. 고백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차인 적도 당연히 없었지만, 무척이나 아파서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오다사쿠의 손에서 힘이 빠지고, 얼굴을 감쌌다. 눈에 찬 눈물을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어서 억지로 눈을 뜨고 눈물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후우, 눈물이 마르기까지 걸리는 시간 동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차가울 정도는 아니지만, 온기가 식어버린 메마른 입술을 손끝으로 쓸다가, 고개를 숙여 입 맞춘 건 반쯤 충동이었다. 처음에는 차가웠고, 그 뒤에는 물기가 묻어났다. 결국, 눈물이 떨어진 걸까. 오다사쿠, 낮게 이름을 속삭이다 떨어졌다. 복실거리는 머리카락을 한 번 쓸었다가, 손을 떼고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오다사쿠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곧 부하들이 올 텐데, 그때까지 눈물 가득한 표정을 보일 수는 없었으니까... ...
그렇게 오다사쿠를 보내고. 49일이 흐른 지금. 시계가 째깍 째깍 돌아가 2분만 흐르면 죽을 위기에 놓여있었다. 운명의 파트너인 상대도 떠났고, 그곳으로. 늘 궁금해하던 그곳으로 가는 것인데 왜 이렇게 두려운지, 이유를 모르겠다. 손끝으로 팔을 더듬었다. 죽는다는 건 어떨까. 아프려나, 무(無)로 돌아가는 거니까 그다지. 안 아파야 할 것 같은데. 49일 뒤 죽는다. 정확히 12시에. 어떻게 죽는 걸까. 운명이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무엇인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1분이 지났다. 머리를 비우고 떠나고 싶다, 오다사쿠. 그의 생각을 떠올렸다. 다시금 첫 만남부터, 마지막까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아, 아아.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눈물인지, 아니면 세상의 끝인지는 미지수였지만, 뿌옇게 흐려지고, 모든 눈앞의 것들이 사라져갔다..
.. 안녕, 세상이여. 안녕, 산화해가는 세상의 꿈이여. 드디어 깨어나는구나, 난. 오다사쿠, 꿈이 아닌 세상에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