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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만나자가 있다면 / 웬디(@Milkywayendy) / 오다자

 

"오늘 처리해야 할 파견 업무는 총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즈마키 사장님께서 부탁 하신 건데, 이건 힘쓰는 일이니 켄지가 가도록 하자."
"네~에~"
켄지는 평소보다 더 해맑게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쿠니키다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란포 쪽을 쳐다보았다.
"다음은 군경의 요청이군요. 며칠 전부터 떠들썩하던 고등학생 실종 사건에 관해 자문을 얻고자 한답니다."
"실종이라니 흥미가 떨어지긴 하지만, 뭐. 언젠데?"
"오전 11시 20분까지 군경 측에서 란포 씨를 데리러 오기로 했습니다. 그냥 기다리시면 됩니다."
점심 먹을 시간 지나면 어떻게 해,라고 투덜거리며 회의실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은 란포의 머리 위로 쿠니키다의 목소리가 화살처럼 쏘아졌다.
"마지막은 다자이, 네 일이다."
"에에~부우우~"
"아침부터, 정말…! 그 바람 빠지는 풍선같은 소리 좀 어떻게 할 수 없냐! 덕분에 모두의 기강이 해이해지지 않나!"
"으응, 쿠니키다 군. 소리를 많이 지르면 탈모가 와!"
"…… 그런 헛소리에는 속지 않는다."
"귀는 쫑긋거리고 있는데?"
"시끄럽다!"
그가 들고 있던 서류철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에 내리쳐졌다. 하지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다른 탐정 사원들은 아츠시를 제외하고 모두 자체적으로 회의를 끝낸지 오래였기 때문에. 말릴 겸 남았던 아츠시는 쿠니키다에게 다가가 그를 살살 말렸다.
"저, 쿠니키다 씨! 다자이 씨도 그 쯤 하면 알아 들으셨을거에요."
"알아듣기는. 저 망할 붕대낭비장치 놈은 내 말을 알아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쿠니키다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츠시에게 서류 중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게 뭐냐는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아츠시의 눈빛만 보고도 쿠니키다는 부가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자이에게 들어온 단독 임무인데, 저 녀석을 혼자 보내기 좀 그렇기도 하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나가는 것인데 안전상의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어 조수 겸 호위 역으로 너도 같이 보내기로 했다. 항구 근처에 있는 낡은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의뢰인이 호텔을 지을 계획이라는데, 철거 도중 귀신이 나타나서 인부들이 작업을 하지 않으려 한다더군. 말하자면 퇴마 의뢰다."
"퇴마… 요…? 물리적인 거면 몰라도 추상적인 걸 어떻게…"
"그래서 다자이에게 의뢰가 들어온 거다. 누군가가 이능력으로 벌인 짓일 수도 있으니 해제해달라는 거겠지. 가서 조사부터 해라. 낮에는 귀신이 없겠지만 일단은."


수첩과 볼펜을 손에 든 아츠시는 호랑이의 코를 이용해 냄새를 몇 번 킁킁 맡다가도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거렸다. 허물다 만 흔적이 있었지만 공사는 거의 시작도 하지 않은 낡은 건물은 중세 유럽의 궁전의 웅장함을 떠올리게 하는 정경을 품고 있었다. 주변이 온통 무성한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그런 것인지 아직 낮이라 햇빛이 환히 비추는데도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긴 했지만. 건물 내부는 오랫동안 버려진 것치고는 꽤나 깨끗했다. 둘은 여기저기를 대강 훑어보며 잠복해있을 장소를 물색했다. 아츠시가 적당한 장소를 찾아냈고, 뭐라도 좀 하라는 아츠시의 타박에 다자이가 적당히 숨기 좋도록 구색을 마련했다. 그러고 나니 더 할 일이 없어 보였다. 건물 주변이라도 둘러볼까 싶어 그들은 조금 뒤에 밖으로 나왔다. 짙은 풀냄새를 맡으며 다자이는 아츠시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러나 표정은 어쩐지 어딘가 언짢은 듯해 보였다. 단독 임무가 싫어서 저러시나? 아츠시는 생각했다. 하지만 조사는 나 혼자 다 하고 있는걸! 시키지 않으면 안 하시잖아! 그런 생각을 하니 또 평소와 같은 패턴으로 흘러가겠단 예감에 그는 대뜸 뒤돌아 다자이를 불러 세웠다.
"아이, 참. 다자이 씨! 이건 제 임무가 아닌데도 아까부터 조사는 저 혼자만 하고 있잖아요! 이제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실 때가 됐을 텐데요?"
다자이는 생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쿠니키다군이 도와주랬잖나. 조금만 더 해주게. 나중에 오챠즈케라도 사 줄 테니."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수에 찬듯한 눈빛이 평소와는 달리 유독 더 슬퍼 보였다. 이전에도 이런 방법을 써서 종종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 있긴 했지만(아츠시는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는 그 눈빛에 늘 넘어가곤 했다), 이번엔 다른 것 같았다. 적어도 아츠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한숨을 내쉰 그는 시계를 보았다.
"일단은 탐정사로 돌아가죠. 조사랄 것도 없었긴 하지만 주변 환경 조사는 이 정도면 얼핏 끝난 것 같아요. 그리고 자정 무렵에 다시 오는 게 좋겠어요."


달빛이 비치는 옛 건물 터는 낮과는 또 달랐다. 이유 모를 슬픔을 담고 있는 그런 느낌을 주었다. 아츠시는 휴대폰 시계를 보았다. 오후 11시 55분, 5분 뒤면 유령이 나타날 것이다. 그는 옆에서 아까보다 더 우중충해진 분위기의 다자이에게 말을 걸었다.
"다자이 씨, 5분 뒤가 자정이에요. 의뢰인에 따르면 그 유령은 자정에 나타나 동이 트면 사라진다고 해요. 아까 말씀드린 거 기억나시죠?"
다자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낮에 탐정사에서 들은 브리핑에 따르면 유령이 나타나는 장소는 한 곳이었다. 건물의 가장 중앙에 위치한 홀. 그래서 둘은 현재 홀에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인 낡아빠져 반쯤 부서진 문 근처에 숨어 고개만 빠끔 내밀고 쏟아지는 차가운 달빛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댕 댕 댕 하고 괘종시계가 열두 번 울렸다. 아츠시가 깜짝 놀라 헉하는 소리를 낼 것을 대비한 것인지 다자이가 그의 입에 가만히 손수건을 갖다 댄 덕분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제 그의 눈은 고정된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곧 유령이 나타날 것이었다. 분명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왜인지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결국 1시가 넘었는데도 그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흐트러짐 없는 다자이와 달리 아츠시는 이제 졸려 죽을 지경이었다. 
"역시 이능력자의 소행이었던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저희의 낌새를 눈치챈 게 분명한데, 대체 어떻게-"
그러나 그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2시 정각이 되는 순간, 문제의 유령이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츠시는 그 이상하고 아름다운 일렁임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서서히 나타났는데 발부터 시작해서 점점 빛의 알갱이 같은 것이 모이더니 빛나는 사람의 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추상적으로 형태만 잡히어, 그저 반딧불이의 빛처럼 자연히 발광하고 있을 뿐이었다. 차갑게 느껴지는 그 모습에 까닭 모를 그리움과 회한이 서려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멍하니 유령을 바라보던 아츠시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호랑이의 감각을 일깨웠다. 그러나 어디에도 흔적 혹은 기척이 없었다. 그는 다자이를 손으로 콕콕 찔렀다.
"다자이 씨, 기척이 느껴지질 않아요. 이능력자의 소행은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유령이면 어떻게 퇴치하죠?"
그러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눈은 환희와 비탄 중 어느 것인지 모를 감정을 담아내느라 바빴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미친 듯이 홀의 중앙을 향해 달려갔다. 저건, 저건 분명히-!

"…… …… 다자이 씨!"

귓가에 우렁차게 들려오는 아츠시의 목소리에 그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어느샌가 다자이 오사무의 모든 것은 유령에게로 향해 있었다. 닿기까지 1cm도 남지 않은 거리였다. 실체도 명확지 않은 그 유령은 그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달려왔음에도 미동 하나 없었다. 다자이는 제 팔을 잡은 아츠시의 손을 뿌리쳤다. 아츠시는 당황했다. 다자이 씨? 하고 재차 그를 불러보았으나 지금 그의 선배는 눈앞의 이형체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 건드리지 마, 아츠시."
"네?"
주어도 목적어도, 밑도 끝도 없는 황당한 명령이었다.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었다. 저것과 마주하는 것이 아니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츠시는 속으로 사죄하며 다자이를 무작정 끌고 나왔다.


새벽이 지나고 점차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밤을 꼴딱 새 버린 다자이와 아츠시는 탐정사의 제 자리에 앉아있었다. 꽉다문 입술에 눈빛은 그저 공허하기만 하였으며 팔짱을 끼고 자리에 앉아있는 다자이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섬찟할만한 것이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공기에 아츠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한 잠도 못 자서 졸리기도 졸렸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분위기 탓에 잠이 오질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출근시간이 되었고 정각에 맞추어 쿠니키다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좋은 아침."
"쿠니키다 씨…"
"잠복은 어땠냐고 묻고 싶긴 한데, 표정을 보아하니 성공한 것 같진 않고. 저 녀석은 또 왜 저러냐, 아츠시?"
"저어, 그게…"
아츠시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다자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유히 쿠니키다를 스쳐 지나갔다. 무언가를 조용히 속삭이면서.
쿠니키다는 허어, 하는 이상한 한숨소리를 내며 아츠시를 돌아보았다.
"아츠시, 일단 숙소로 돌아가 잠부터 자고, 어제의 그 임무는 잊어버려라. 네가 없어도 될만한 문제였나 보다."


어제와 같은 풍경, 어제와 같은 날씨, 어제와 같은 시간. 다자이 오사무는 홀로 어제와 같은 장소에 도착했다. 코트를 단정히 탁탁 털어내고 한 손에는 흰 꽃을 들고서 그는 천천히 그곳으로 들어갔다. 열두 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고 시간은 기약 없이 흘러갔다. 새벽이 깊어갔다. 다자이는 아무리 오래더라도 지겨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 곧 나타날 거야, 조금만 있으면, 그는 그렇게 스스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오전 3시 반. 다자이의 손톱 밑이 약간의 피딱지로 굳어갈 때 즈음 유령이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자이는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것에게로 다가갔다. 이제 둘은 마주 보게 되었다. 그는 그리움과 애틋함을 한껏 담아 유령의 진명을 불렀다.
"오다 사쿠."
그의 말이 닿는 순간, 유령을 가리고 있던 빛이 사악 흩어졌다. 그리고 이름은 주인을 되찾았다. 유령은, 아니, 오다 사쿠노스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다자이."
다자이는 눈앞의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만지려 했다. 그러다 혹여 제 이능력 탓에 그가 사라질까 두려웠는지 도중에 멈추었다. 허공에서 정지한 채 떠는 손이 어찌나 애처로웠던지, 아무리 눈치 없는 오다 사쿠노스케라 하더라도 무얼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차갑고 투명한 손으로 다자이의 손목을 이끌어 제 뺨에 대었다.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놀람으로 동그래진 다자이의 모습은 4년 전을 쉽게 떠올릴 수 있게 했다. 오다는 긴 말은 하지 않았다. 그의 방식대로, 조용히 미소 지으며 다자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다자이 오사무에게 있어서 백 마디의 말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다. 어느새 다자이의 눈에는 눈물이 방울방울 고였다. 눈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려 그의 뺨을 적셨다. 오다는 그것을 닦아줄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다자이는 그런 오다의 마음을 안다는 듯 웃어 보였다.
"오다 사쿠."
"그래."
"나, 탐정사에 들어갔어."
"그랬군."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어. 자네의 유언대로."
그러고 나서 다자이는 눈물을 마저 닦느라 잠시 뜸을 들였다. 울음을 그치고 의연한 자세로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언젠가 운이 좋아 자살에 성공하거나, 우연한 사고를 당하거나. 아니면 내 생명의 촛불이 꺼져 죽음을 맞이한 후, 자네를 만나게 되면 묻고 싶은 것이 있었어."
"무엇인데?"
"아까 자네를 본 순간 잠시 흔들렸네. 하지만 성급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지."
"그렇군."
"묻고 싶은 심정은 굴뚝같지만, 이런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동등해진 위치에서 진실로 자네를 만나게 되면, 그때 묻겠네. 기다려주겠나?"
오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마든 기다릴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리에 풀썩 앉아 제 옆자리를 탁탁 쳤다. 앉으라는 표시였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냉기에도 다자이는 어미를 따라다니는 아기 새처럼 그의 옆에 꼭 붙어앉았다. 그리고 예전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의미 없지만 그들 나름의 의미가 담겨있는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의 새 파트너와 후임, 탐정사에서의 하루, 이직을 해도 끊이지 않는 러브레터(이 대목에서 오다는 넌 좀 자제할 필요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다자이는 안고 같은 소리 하지 말라며 입을 부루퉁 내밀었다), 요리 실력이 조금은 는 것 같다는 허풍 등을 이야기했다. 더없을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새벽의 향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는 곧 동이 틀 것이고,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의 손을 잡고 영영 놓지 않고 싶었다. 그 불안한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오다는 되려 손을 먼저 놓아주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밝아오는 여명을 바라보았다. 야속한 해는 달보다 빨리 떠올라 그의 몸이 햇살과 하나가 되게 했다. 그는 다자이를 차갑고도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이젠 진짜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고, 서서히 소멸하는 오다를 보며 다자이는 문득 그에게 아직 꽃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손에 얼마 안 지나 주인을 잃을 꽃을 쥐여주고, 그는 마지막으로 오다의 입모양을 볼 수 있었다.

다음 생에 만나자, 다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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