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 다락방 (@Attic_of_DE) / 리버시블 CP
한적한 평일 낮 시간대, 창밖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유난히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이 따분하여 고개를 돌린 때였다. 아슬아슬하게 신호에 걸린 차가 정차했다. 느릿느릿 흐르는 인파 속에서 붉은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자이는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을 떠올리며 남자의 이목구비를 살폈다.
‘오다 사쿠?’
물리적 거리상 외관을 조목조목 따질 순 없었지만 확실히 그였다. 오늘은 휴일이라 들었는데 시내로 구경을 나온 모양이었다. 전화를 걸어 낭랑한 목소리로 ‘오다 사쿠, 지금 사거리에 있지? 어디 보자. 자네가 서 있는 길 건너에는 아마도 패스트푸드점이 있을 테고, 그 옆에는 휴무일인 잡화점이 있겠지. 어때?’ 라고 말하면 그는 틀림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친구의 위치를 확인하려 들 것이다. 매사 남다른 사고로 움직이는 그에게도 어찌됐건 무미건조한 행동 패턴이 있다는 건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상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행한다면 생동감까지 더해질 테지만, 찰나의 상상으로도 충분했다. 다자이는 만족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뭘 저렇게 열심히 보고 있는 건지.'
석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의 시선은 아까부터 한곳에 집중되어있다.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 골몰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뒤늦게 시선이 향한 곳에 관심이 생긴 다자이가 창문을 내렸다. 차가 정차되어있으니 그 역시 자신을 쉽게 발견하리라.
타이밍 좋게도 신호등이 카운트다운을 하듯 초록불로 바뀌고, 자가용이 다시 매끄럽게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고양이처럼 고개를 쭉 빼던 다자이는 확실한 반동으로 헤드레스트에 얼굴을 박았다. 자석의 S극이 N극에 끌리듯이. 잠깐 별이 보인 듯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운전수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프로다운 운전 실력을 유지했다. 빨개진 코를 매만지고 나니 보고 있던 풍경은 어느새 다른 거리로 뒤바뀌어 있었다.
다자이는 그에게 직접 묻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며 얼핏 스쳐간 상호명을 기억해두었다.
…
[연관 검색어]
전자제품, 면도기 세일, 남성 면도기, 요코하마
“전자제품?”
무심히 마우스를 달칵거리던 소리가 멈췄다. 키워드를 연달아 클릭하니, 제가 본 것과 비슷한 장소의 사진이 검색된다. 오다 사쿠노스케가 보고 있던 상점은 얼마 전 요코하마 시내에 새로 개점한 전자제품 판매점으로, 오픈 기념 할인이 한창이었다. 파격적인 가격과 친절한 서비스에 방문자들의 만족도도 상당했다. 그 때문에 방문자 후기, 내부 사진 등이 여럿 떴지만 딱히 필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가게 사진을 확대해 보니 간판 색깔이나 전체적인 외관이 제가 기억하는 것과 얼추 비슷해 보였다.
그날 확인하지 못한 '오다 사쿠는 무엇을 보고 있었나?' 하는 의문도 곧바로 해소되었다. 매장 전경 사진의 진열장에는 면도기가 진열되어있었고, 진열장 위에는 할인가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이거였나. 다자이가 중얼거렸다. 그리도 열심히 보고 있던 게 면도기였다. 왜 하필 면도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자이는 차근차근 오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아. 수긍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의 턱은 대체로 까칠했다. 이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수염을 기를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완벽히 제거된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 딱 한 번, 오다에게 직접 수염을 기르고 싶은 거냐 물은 적이 있었다. 술김에 막연한 호기심이 입밖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랬더니 오다는 잠깐 동안 허공에 시선을 내던지다 확실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소리를 내었다. 술에 취해 벌개진 얼굴로 말이다.
당시에는 그 나름대로 취향을 고수한다 여겼는데, 사실은 면도기가 오래돼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다자이는 유추한다. 만에 하나 그렇다면 친구의 새 면도기의 구입을 돕는 것도 썩 괜찮겠다는 생각이 번뜩 떠오른다.
"…하나 선물해줄까?"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남성에게 면도기는 필수용품이다. 어느 정도 값이 나가는 제품은 잘 고장나지도 않는다. 아마 두고두고 쓸 수 있을 것이다. 검은 머리가 흰 파뿌리 될 때까지……는 아니겠지만, 사용에 따라서는 반영구적이다. 이 얼마나 실용적인 선물인가!
검색어를 바꿔 구매처로 들어가니, 각 브랜드가 평이 좋은 순대로 나열되어있다. 그 중 디자인도 괜찮고, 품질도 좋고, 브랜드도 괜찮은 상품 하나가 눈에 띈다. 가격이야 문제될 게 없다. 이어서 다자이는 그에게 선물을 건네는 상황을 상상해본다. 친구에게 선물을 받은 오다 사쿠노스케…. 그의 표정은 뿌연 안개가 낀 듯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감사를 표하는 목소리가 생생하다.
고맙다. 다자이.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
실패였다. 이토록 완벽하고 처참한 실패를 거둘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첫 시도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시간은 일주일 전, 장소는 루팡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횡단보도. 그날 밤 다자이는 루팡으로 향하던 중 오다를 만날 수 있었다. 늦은 밤인사를 건네고 안주거리도 되지 못할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눴다. 머지 않아 깜박, 하고 초록불이 켜졌다. 횡단보도를 다 건널 때까지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다자이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안쪽 주머니에서 포장된 상자를 꺼내들었다.
"오다 사쿠, 이거."
오다의 두 눈이 깜박거렸다.
"별 건 아니고, 면도기인데, 자네 생각이 나서 하나 샀어."
대단치도 않은 선물이었다. 수 백 만원을 호가하는 선물에 비하면 이 정도는 별 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아니, 마음만 받으마."
그래서 다자이는 당연히 오다가 이 선물을 받을 줄로만 알았다. 너무나 단호히 거절하는 목소리에 다자이는 제 귀가 의심스러웠다. 어? 자신도 모르게 어벙벙한 소리를 냈다. 오다는 다자이의 반응이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태연자약한 얼굴을 하고 상자를 도로 품에 안겨줄 뿐이었다. 선물 상자가 부메랑처럼 다자이의 품으로 돌아왔다. 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깜박거리던 초록불이 빠르게 빨간불로 바뀌었다. 누군가 무단횡단을 했는지 뒤에서 '똑바로 보고 다녀, 이 자식아!' 라는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멍한 기분이었다.
두 번째 시도는 좀 더 신중했다. 그와 있던 일을 수 차례 곱씹은 결과, 다자이는 자신이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선물을 건넸다고 확신했다. 지난번 분위기도 나쁘진 않았지만, 자고로 선물이라는 건 대화 주제와 연관될 때 보다 자연스러운 법이다. 선물을 받을 거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라면 누구라도 부담을 느낄 것이다. 물론 기뻐하는 사람도 있긴 있겠지. 하지만 지난 경험을 토대로 하면 오다 사쿠노스케가 그런 타입은 아닌 듯했다. 그러니 두 번째는 우선 대화주제를 그쪽으로 유도해보자.
저번과 마찬가지로 분위기는 좋았다. 대화 주제가 면도로 옮겨갔을 때는 약간의 쾌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시뮬레이션을 한 보람이 있었다. 선물을 줄 수 있는 적시적기는 바로 지금이었다. 다자이는 환하게 웃으며 고급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꺼냈다.
"오다 사쿠 오늘따라 수염이 멋진걸! 그런 의미에서 이걸―"
"괜찮아 다자이."
이번에는 끝까지 다 듣지도 않고 말을 끊었다. 심지어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물 흐르듯 거절했다. 제가 충격을 받았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지 오다는 위에서 호출이 왔다며 급히 자리를 떴다. 이럴 수는 없었다.
세 번째 순간이 오자 다자이는 현대인의 힘을 빌려보기로 했다. 검색어도 다양했고, 질문자도, 답변자도 다양했다. 세상에 선물 건네기를 고민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처음 알았다. 그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인간들은 제일 가는 멍청이라 생각했는데 자신이었다. 그쯤이야 언제나 쉬운 일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나 어렵다. 정보는 차고 넘쳤지만 사실 모든 정보가 쓸 만한 건 아니었다. 개중에는 '태어나서 한 번도 선물이란 건 해본 적이 없나?' 싶은 인간이 남긴 답변도 있었고, '이 사람은 친구가 없나?' 싶은 답도 있었다. 무가치한 정보를 거르고 걸러 마침내 다자이는 꽤 괜찮아 보이는 현대식 방법을 하나 찾아냈다. 크게 생색내지 않으면서도, 깔끔하고, 친근하며 재치있고 상대에게 부담을 적게 주는 방법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오다 주웠네.”
“나를?”
그리고 정적. 직감적으로 이번에도 망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민 끝에 강경책을 사용하기로 했다. 소중한 친우인 만큼 과격한 방법은 가급적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수차례 반복된 거절에 다자이의 이성은 흐려져갔고, 스스로 자각은 없었지만 다자이는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이쯤되니 그에게 선물을 주려고 했던 본래의 이유조차 뒷전이었다. 부드러운 방법은 아니지만, 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진 않을 테니 괜찮다. 그저 인간의 공포심을 약간 이용하는 짓궃은 방법일 뿐이다, 라고 다자이는 생각한다.
결판을 짓는 장소는 공원이었다. 30분 전, 다자이는 오다에게 전화를 걸어 이곳으로 나오라 요청했다. 반드시 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니, 그는 분명 올 것이다. 다자이는 그를 잘 알았다. 공원 시계의 분침이 반바퀴를 돌자 계획대로 멀리서 걸어오는 오다가 보였다. 다자이가 손을 흔들자 오다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오다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다자이에게 무슨 일이냐 물었다. 통화 내용을 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선한 마음을 이용하자니 양심이 약간 아파왔다. 하지만 어차피 제 직업은 마피아 간부가 아닌가? 그리 생각하니 거리낄 게 없어졌다. 다자이는 세 번 거절당한 그 상자를 다시금 꺼내며 긴박함을 숨김없이 과장스레 드러냈다.
"오다 사쿠…. 자네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이 상자 때문일세. 이 상자는 전문점에서 고급스럽게 포장한 평범한 선물 상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10초 후에 폭발하는 시한폭탄으로…! 자네가 받지 않을 시―"
오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효과가 있었는지, 잠자코 말을 듣던 오다가 여태까지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뒤이어 고분고분한 얼굴로 상자를 낚아챘다. 드디어 선물 증정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던 그때, 오다가 전력투구를 하듯 강물로 상자를 집어 던졌다. 첨벙 소리가 나더니 상자는 유유히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혹시 저 소리는 삼진 아웃을 알리는 신호인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고가 채 따라가지도 못했는데 오다가 다자이를 안고서 냅다 바닥으로 굴렀다. 큰 동작으로 움직인 탓에 주변의 시선이 자연히 두 사람에게 집중됐다. 코트는 흙투성이가 되어버렸고, 등이 아팠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는지 오다의 큰 손이 다자이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감쌌다. 다자이는 바닥에 누운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등이 아파서는 아니었다. 코트가 더러워져서도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감싸안아서도 아니었다. 조금 감동은 받았지만. 여름 끝무렵의 하늘은 참, 맑고 높았다. 그러는 동안 오다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상자가 착지한 포인트를 응시했다.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 걸 조금 의아하게 여기는 듯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폭탄 같은 건 설치하지 않았다. 미치지 않은 이상, 어느 누가 친구에게 줄 선물에 폭탄을 설치하겠는가. 그런 짓은 마피아 간부라도 하지 않는다. 행인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두 사람을 둘러쌌지만 오다는 여전히 신경을 곤두세운 채였다. 그 때문에 소란스러운 주변과 달리 둘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 흐른다. 이윽고 폭탄이 터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든 오다는 다자이에게로 다가온다. 몸을 일으킬 기운도 없어 누워만 있으니 오다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지었다. 그런 게 아니다. 본의 아니게 친구에게 쓰레기 불법 투기를 시킨 게 우스워서 그렇다. 엄연히 따지면 쓰레기는 아니었는데… 아니, 이제는 버렸으니 쓰레기가 맞겠지.
"다자이, 다친 곳은 없나?"
"으응, 고맙...고맙네."
이토록 상냥하고 자비 없을 수 있나. 정말이지, 여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