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무고 / 노트 (@noteofb) / 오다자

 

사카구치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전날 먹고 남은 카레를 데우고 있을 무렵이었다. 오다는 주걱으로 카레 젓기를 계속하며 전화를 받았다. 낮은 불로 데워진 냄비 속에서 김이 올라왔다. 푹 익은 고기와 갖은 채소와 향신료가 어우러진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여보세요. 오다 사쿠 씨, 전화 괜찮으신가요?
"물론 괜찮아, 안고. 무슨 일이지?"
다자이라면 새로운 자살 방법이 떠올랐다든가, 엄청나게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든가, 하늘이 맑아서 오다가 생각났다든가하는 이야기를 휴대 전화가 뜨거워질 때까지 쏟아냈겠지만 사카구치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말은 오다가 냄비 바닥을 세 번 긁기도 전에 끝났다. 용건은 간단했다. 그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그 작은 방의 자료를 정리해야 하니 자료나 기계를 내고 들이는 일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사흘 뒤면 출장인데, 저 혼자서는 그걸 다 했다가는 그 안에 안 끝나요.
오다는 언젠가 보았던 그 작은 방의 정경을 떠올렸다. 창문이 없는 그 작은 방은 사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책장마다 파일이 가득했다. 그 대부분이 자금 세탁 장부를 비롯한 포트 마피아의 자금에 관한 기록이었다. 위치부터 숨겨진 곳에 보관된 것이니,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걸 내가 봐도 괜찮나?"
-오다 사쿠 씨라면 괜찮아요.
별 것 아니라는 듯 사카구치가 대답했다. 오다가 자신이 포트 마피아에서 그정도로 신뢰와 지위를 쌓을 일을 한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는데 사카구치가 말을 덧붙였다.
"당신도 포트 마피아의 조직원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오다 사쿠 씨에게 부탁드릴 건 단순한 작업이에요. 딱히 엄청난 기밀도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일을 이야기할 사람이라고 해봐야 다자이 군 정도니까요."
"그도 그렇군."
오다는 바로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들고 만의 연안에 있는 회계 사무소로 갔다. 관리인의 방 뒤에 숨겨진 그 방은 창문도 없는데다 공기 순환 시스템도 아주 낡은 것이라 낮은 문을 열자 바로 닫힌 공간 특유의 눅눅하게 묵은 냄새가 끼쳤다.
해가 중천인데 사카구치는 벌써 한밤중인 듯 피로한 얼굴이었다. 식사 시간이 지났으니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이 분명했다. 오다는 사카구치와 함께 간단한 식사를 하고 조금 기운을 차린 그와 함께 작은 방을 가득 채운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두껍고 얇은 파일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그 뒤에 숨어 있던 먼지가 폴폴 피어올랐다. 책장에 손대기 전만 해도 하얗던 장갑도 금세 노랗고 검은 때로 얼룩덜룩해졌다. 몇 번째인지 모를 재채기를 하며 오다는 이곳에서 일하는 친구의 폐를 걱정했다. 다자이라면 숨쉬는 것만으로도 자살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매우 기뻐했을지도 모르겠다.
방 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책상에 꺼낸 파일들을 가져다 놓은 오다는 반대편에 쌓인 파일을 집어 들었다. 여기에 놓인 것은 사카구치의 검토가 끝난 것이다. 그는 파일을 원래 위치에 꽂아 넣고 철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다른 책을 마저 가져옮겼다. 파일탑이 점점 높아지자 쉴 새 없이 종이를 넘기던 사카구치가 드디어 안경을 벗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조금 쉽시다."
몇 시간을 쉬지도 않고 파일을 들여다 봤으니 지칠 만도 했다. 사카구치가 뒤쪽에 놓아둔 따로 정리가 필요한 책을 상자에 옮겨 담고서야 오다는 계단참에 앉아 장갑을 벗었다. 순간 코끝이 간지럽다 싶더니 이능력이 발동했다. 저항할 틈도 없이 오다는 영상으로 본 것과 똑같이 크게 재채기했다. 작은 방에 천둥 같은 소리가 퍼졌다. 오다는 민망한 심정으로 사카구치를 보았다. 말을 하려는데 먼지를 한껏 들이마신 목에서는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금붕어처럼 그저 뻐끔거리고 있자 사카구치가 대단히 미안한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 오다 사쿠 씨. 먼지가 너무 많지요?"
"…큼. 흠. 아니, 괜찮, 괜찮아."
마치 오십 년 뒤에나 낼 법한 제대로 갈라진 목소리였다. 사카구치의 표정이 더 극적으로 변했다.
"마스크를 준비해 둘 것을 그랬군요. 이렇게 먼지를 많이 마시다간 폐가 까매지고 말 거예요."
"나보다는 네 폐쪽에 더 문제가 아닐까."
사카구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제 폐에 문제가 생긴다면 여기서 마신 먼지보다는 담배 때문이겠죠. 똑같이 건강에 안 좋다면 그쪽이 낫습니다. 기분이라도 좋잖아요?"
"나도 마실 거라면 먼지보다는 술이 좋아."
"이따 마시러 갈까요?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목적지가 생략된 말이었으나 오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함께 술을 마시러 가는 가게는 한 곳뿐이니까. 그리고 운이 좋다면 그곳에서 다자이를 만날 수도 있겠지. 
"좋지. 그러면 얼른 일을 끝내야 하겠군."
의욕충천해 몸을 일으키는 찰나, 뒤쪽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오다는 어정쩡한 자세로 움직임을 멈췄다. 평범한 회계 사무소로 위장하고는 있지만 이곳은 포트 마피아의 돈을 세탁하는 시설 중 하나였다. 특히 이 숨겨진 방은 포트 마피아의 자금 흐름을 일부나마 알 수 있는 기록이 보관된 곳으로, 공간 자체도 관리인의 방 뒤에 숨겨져 있고, 당연하게도 문 역시 눈에 띄지 않도록 위장되어 있다. 오다는 눈을 굴려 사카구치를 보았다. 누군가 방문하기로 했다면 사카구치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안경을 쓴 사카구치가 경계 어린 눈으로 문쪽을 보고 있었다.
짧은 통로를 지나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발소리에 맞추듯 익숙한 냄새가 진해졌다. 몇 달 전까지 지겹도록 맡았던 그 냄새, 피와 시체의 냄새였다. 문 너머에서는 총소리도 비명도 들리지 않았지만, 오다도 소리를 죽이고 사람을 죽이는 방법 정도는 두 손이 부족할 정도로 알고 있다. 그는 몸을 긴장시키고 잠시 후 이능력이 보여줄 영상을 기다렸다.
아무 영상도 보이지 않았다.
굴 밖으로 나오는 다람쥐처럼 살그머니 고개를 내민 것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얼마든지 숨겨진 방에 드나들 자격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다자이?"
"다자이 군?"
"어라?"
오다와 눈이 마주친 포트 마피아의 최연소 간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좋은 밤이야, 오다 사쿠. ….그런데 자네가 여긴 왜 있어?"
오다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자이의 시선이 그의 뒤로 넘어갔다. 사카구치의 얼굴을 확인한 다자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사람 뭔가 재미난 거라도 하고 있었나?"
질시어린 눈빛이었다. 눈에 핏발이 서도록 곰팡내 나는 종이만 들여다 봤던 사카구치가 몹시 억울한 얼굴로 대꾸했다. 저 인간이 무슨 상상을 하고 저런 눈을 하는지는 짐작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일하고 있었어요. 일."
다자이도 마주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난 빼놓고?"
"도와주실 건가요?"
안타깝게도 불법 폭력조직 자금 세탁 전문 회계사의 조수가 조직에 다섯 뿐인 간부 중 한 명을 부려먹을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았다. 다자이는 통로를 지나오느라 구부정하게 숙였던 허리를 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싫~어. 나야말로 지금까지 일하다 왔단 말일세."
"이 시간까지?"
오다가 설핏 미간을 좁혔다. 등불 아래로 나온 다자이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진동하는 피냄새에 포트 마피아의 일을 하다가 왔으리라는 것 정도는 짐작했지만, 실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본래부터 제대로 빗고 다니지 않던 머리칼은 태풍을 맞은 것처럼 쑥대밭이 된 데다 어디서 어떻게 굴렀는지 옷이고 얼굴이고 피에 검댕에 온갖 지저분한 것이 잔뜩 묻어 엉망이었다. 치마를 입고 빗자루를 쥐면 신데렐라로 분장한 소년으로 보일 것이다. 아직 체격이 작으니 잘만 하면 소녀로 보일 지도 모르고.
"어쩔 수 없지. 비즈니스 매너 같은 걸 지킬 정도로 예의 바른 녀석들도 아니니까. 그리고 밤은 원래 마피아의 시간이라고."
다자이가 타박타박 계단을 내려갔다. 뒤늦게 피냄새에 가렸던 화약 냄새가 훅 끼쳤다. 사카구치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세요!"
다자이는 카펫을 두 걸음 앞두고 걸음을 멈췄다. 그는 슬쩍 뒤를 돌아보고 수줍게 목 뒤를 긁적였다. 구멍 뚫린 쓰레기 봉투를 질질 끌어 옮긴 것처럼 나무 바닥에 질척하게 더러운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음…이래서 욕실을 좀 빌리려고 온 건데."
"여길 무슨 샤워 시설로 아시나본데 이런 일로 자꾸 찾아오지 좀 마세요, 다자이 군."
사카구치가 치를 떨었다. 다자이가 가볍게 어깨를 들먹였다.
"어쨌든 욕실은 있잖아. 이보게 안고, 난 중요한 작전을 수행하고 왔단 말이야. 이건 모두 영광의 상처란 말일세."
"다쳤나?"
오다가 물었다. 그렇잖아도 후각이 마비될 정도로 강한 피냄새가 신경쓰이던 차였다. 검은 정장이 축축하게 젖어서 평소보다 더 짙은 색이었다. 조금 전의 움직임으로 볼 때 큰 부상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게 본인의 몸에서 나온 피라면 다자이가 지금 가야 할 곳은 욕실이 아니라 병실이다.
오다의 눈이 다자이의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시선에 민감한 편인데도 다자이는 가만히 그 눈길을 받고 있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던 그는 잠시 오다와 눈을 맞대더니 옅게 웃었다.
"뭐어, 죽지는 못했지."
오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것을 보고 다자이가 손을 내저었다.
"이런. 내 피 아니야. 대담무쌍하게도 우리 무기고를 노린 녀석들의 피지. 다른 곳도 아니고 포트 마피아 3개 주요 무기 보관소 중 하나를 노리기에 내가 얼마나 기대를 했는지 알아? 용두항쟁 이후로 이렇게 가슴 뛰게 만들어 주는 녀석들은 오랜만이었다고. 그래서 최선을 다해 지원도 받고 작전도 짰는데 미끼 좀 흔들었다고 사흘 굶은 개처럼 헐레벌떡 달려오는 녀석들일 줄이야. 최소한의 경계심은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실망이 컸어!"
가볍게 말하고는 있지만 적을 무기고에서 떨어진 곳으로 유도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각종 총화기와 폭약이 쌓여 있는 곳에서 총을 난사해가며 싸우다 자칫 폭발이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당연히 적도 죽겠지만 포트 마피아가 각종 불법적 수단으로 모은 소중한 무기들도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포트 마피아의 무기고는 한두 곳이 아니니 그정도 날아간다고 당장 무기가 부족해지는 일은 없겠지만, 무기고 하나에 보관되는 무기의 금액만 따져도 엄청난 액수였다.
"그래서 적은 인원으로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경보 시스템을 손볼 생각이야. 일정 거리 내에만 접근해도 경보가 울리도록. 확실히 지금 시스템은 너무 낡았어."
"…다자이. 오늘 싸움에서 너는 어느 쪽에 있었지?"
문득 오다가 물었다. 마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것처럼, 다자이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미끼지. 간부가 모범을 보여야 부하들도 잘 따를 게 아닌가."
"…."
"뒤에서 전선 지휘만 했다면 이렇게 지저분해졌을 리가 없잖아. 역시 지난 항쟁 때 사망자가 많았던 게 크다니까. 어중이 떠중이에게까지 주요 무기고의 경비를 맡겨야 하는 상황이라니. 경비는 고양이에게 맡겨야지 생쥐들에게는 맡겨봤자야."
중얼거리던 다자이가 갑자기 오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다 사쿠는 아직도 고양이 역할에는 관심이 없나?"
"없어. 야옹야옹 우는 쪽이라면 모를까."
"…그런 역할에 관심이 있었어? 음, 제법 어울리기는 하는데…."
"두 분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신 거죠?"
사카구치가 순식간에 다른 길로 빠지는 대화를 잘랐다. 다자이는 천연덕스럽게 하던 말을 계속했다.
"안고가 생쥐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그랬나?"
오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봐, 잘 어울리잖아. 안경도 썼고."
"생쥐와 안경이 대체 무슨 관계죠?"
"글쎄? 곧 정보원이 되잖아. 이정도는 스스로 알아내게."
"몰랐다. 축하한다, 안고."
"감사합니다…."
축하를 받는데 왠지 머리가 아팠다. 사카구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 어느새 가까이 접근한 다자이를 보고 흠칫 놀라 물러섰다. 그 반응에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다자이가 양팔을 활짝 펼쳤다. 길고 가는 손가락이 바닷속을 유영하는 해파리의 촉수처럼 꿈질거렸다. 
"이거 맞지? 오다 사쿠도 같이 할래?"
"싫어요!"
비명 같은 외침에 다자이가 우는 시늉을 했다.
"매정해."
"매정한 건 정리중인 곳에 들어와서 실껏 더럽히고 있는 다자이 군이죠. 그리고 여길 청소하는 건 저란 말이에요."
그건 몰랐다. 오다는 가시도 일어나지 않고 무릎으로 기어가도 아무 것도 묻지 않는 반질반질하고 청결한 나무바닥을 떠올렸다. 사카구치가 청소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다자이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쩐지 자네가 온 뒤로 유난히 깨끗해지기는 했어."
"…."
이마를 짚은 사카구치가 책장 한쪽으로 가버렸다. 빙글 뒤로 돌아선 다자이가 오다를 보았다. 멀뚱멍뚱 보고 있자 그가 조금 전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우리끼리라도 힘껏 안을까? 그리고 그때처럼 더러워진 몸으로 함께 술을 마시러 가는 거야!"
"술이라면 이따 마시러 가기로 했다."
"뭐?"
다자이가 빽소리를 질렀다.
"나는?"
"아까는 네가 없었어."
"그래도 그렇지!"
"자요. 얼른 씻고 오세요."
책장 안쪽에서 옷과 수건을 꺼낸 사카구치가 다자이에게 그것을 건넸다. 다자이가 코트를 벗고 그나마 말끔한 쪽으로 옷과 수건을 받아들었다.
"정말 둘이서만 술 마시러 가기로 했단 말이야?"
다자이가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포트 마피아의 간부쯤 되면 함께 술을 마실 사람이 없지도 않을 텐데, 다자이는 언제나 숨어들듯 어두운 골목의 좁고 작은 술집으로 찾아와 오다와 술잔을 부딪치고는 했다. 오다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그리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닐 텐데도.
"술집에서 널 만나면 셋이 마시는 게 되잖아."
"그거랑은 달라."
"그런가?"
"뭘 자꾸 받아주고 계세요, 오다 사쿠 씨. 다자이 군 당신은 얼른 씻으러 가세요. 좀."
사카구치가 파리 쫓듯 손을 휘저었다. 다자이가 바람에 밀려나는 날파리처럼 쫓겨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작은 방에는 다자이가 뿌리고 간 지독한 피냄새와 화약 냄새만 남았다. 잠시 서 있던 사카구치는 갑자기 정신이 든 것처럼 책장으로 달려가더니 분무기를 꺼내 안에 든 액체를 열심히 분사했다. 화사한 꽃향기가 확 퍼졌다. 피냄새를 덮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다른 향이 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졌는지 사카구치는 한결 밝은 표정이 되었다. 그는 다시 책장으로 달려가 청소 도구를 꺼내 들고 오다에게도 걸레를 쥐여 주었다.
"이런 것까지 맡겨서 죄송합니다. 오다 사쿠 씨."
"괜찮아, 안고."
분실물을 찾으러 갔다가 그 집 전체를 청소 해주고 가는 일도 있었는데 이 좁은 방 청소 정도야 어려울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이 계단과 통로에 달라 붙어 열심히 닦고 뿌리고 훔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사카구치는 후련한 얼굴로 책상 밑 휴지통에 손에 든 것을 던져 넣었다. 오다가 걸레를 어떻게 할지 묻자 사카구치는 그것도 쓰레기 통에 넣고 더욱 개운해 했다.
청소를 끝낸 뒤 오다는 장갑을 끼고, 사카구치는 책상 앞에 앉아 둘은 다시 원래의 일을 했다. 냉정한 회계사 조수의 얼굴로 돌아갔던 사카구치가 문서를 넘기다 문득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들어 항쟁이 잦군요."
오다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용두항쟁에서 포트 마피아를 제외한 요코하마의 거대 불법 폭력 조직등리 모조리 괴멸한 이후, 이 도시의 암흑가는 포트 마피아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거의 암흑가를 평정한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에 포트 마피아에 싸움을 걸 조직이 더 남아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사카구치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덧붙였다.
"물론 용두항쟁처럼 조직원이 총동원되어야 하는 대규모 항쟁이 흔히 일어나지는 않지만요. 오늘 다자이 군이 말한 사건도 그렇고, 어딘가 불온한 움직임이 있는 것 같아요."
"다른 조직의 잔당일까."
"그럴지도 모르죠."
복잡한 얼굴을 하던 사카구치는 오다가 책장 한 칸을 다 비울 즈음 때 보던 파일을 덮고 일어섰다.
"다자이 군이 오면 술을 마시러 가야 할 테니, 이만 정리하죠. 여기까지만 부탁드립니다."
"알겠다."
오다는 책장 왼편에 쌓인 파일을 들고 사다리를 올라갔다. 낡은 철제 사다리가 삐걱거렸다. 꼭대기에 앉아 파일을 통째로 꽂아 넣고 한 권씩 빼서 순서대로 정리했다. 책장을 비우며 한 번씩 쓸었던 덕에 빈 공간은 모두 깨끗했고, 먼지 냄새 대신 꽃향기에 섞인 피냄새가 희미하게 공기 중을 떠돌았다.
피냄새.
다자이는 일부러 미끼가 되었다고 했다. 조직원들에게, 부하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짓까지 하지 않아도 그를 외경하는 부하는 충분히 많으니까.
사람은 이해를 벗어난 존재에게 매혹되고는 한다. 그리고 누구도 다자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아끼고 무엇을 없애고자 하는지, 무엇을 옹호하고 무엇을 고발할지….또한,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오다는 언젠가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다자이는 공포를 모르는 사람 같다고 했다. 총탄이 빗발치면 누구라도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기기 마련인데, 다자이만은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마치 환영하듯 오연하게 그 자리에 서 있다고. 그런 짓을 하는데도 다자이는 지금까지 정장에서 총상을 입은 적이 없었다. 그 무외無畏, 오만, 적에 대한 냉정과 무자비…그 모든 것이 마치 마치아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고,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이 말했었다.
다자이가 총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죽고 싶어 하니까. 머리와 목의 붕대는 이미 생긴 부상이 아니라 다가올 사망에 대한 예고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다자이는 무엇을 위해서 계속해서 전선에 나서고, 미끼를 자처하고, 총구 앞으로 다가가며 자신을 살해하려고 하는 걸까.
오다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려 보았다. 그에게도 죽음이 두렵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죽게 된다면, 그저 자신의 차례가 왔을 뿐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그러나 오다는 이미 과거의 그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의 자신은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속의 등장인물처럼 낯설었다.
세상의 무엇이 다자이에게 죽음보다 우선할 수 있을까.
오다는 파일을 순서대로 정리한 뒤에도 가만히 책등을 바라보았다. 어떤 질문은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겠지만, 다자이의 답은 종이 위에는 없을 것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아래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오다는 한숨을 쉬고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다자이는 제대로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왔는지 창백한 얼굴 위로 늘어진 머리가 젖은 그대로였다. 사카구치는 바빠 보였다. 오다가 다자이에게 손짓했다.
"이리와라."
"으응?"
"머리 덜 말리고 다니면 감기 걸려."
"와아, 모리 씨도 그런 말은 안 하는데…이제 애 생겼다 이건가?"
재미있는 건수라도 생긴 것처럼 낄낄거리며 다자이가 수건을 내밀었다. 손짓을 따라 밀려드는 습한 공기에서 비누 냄새가 났다. 피냄새가 순식간에 그 밑으로 자취를 감췄다. 다자이가 16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진정으로 그가 16살 소년으로 보이는 때는 드문데, 이처럼 평범한 향기를 풍기는 다자이는 보통의 십대 소년 같았다. 그가 조금 전 피를 뒤집어 쓰고 온 포트 마피아의 간부인 것을 알면서도.
돌연 오다는 자신에게서도 피냄새가 완전히 씻겨 나갔을지 궁금해졌다. 지금도 자신에게서는 타인의 피냄새가 날까, 아니면 이 작은 방의 먼지와 꽃과 피와 비누 냄새가 날까. 담배를 피웠을 때는 담배 냄새가 났겠지만, 담배를 끊은 지금은 어떤 냄새가 나는 지도 알 수 없다. 다자이가 그렇게 카레를 먹으면 몸에서 카레 냄새가 날 거라고 말한 적은 있지만.
아직 무엇도 해내지 못했으니 아무 것도 아닌 냄새가 날까.
"아이들을 돌봐주는 건 가게의 아저씨셔. 나는 양육비만 조금 드리기로 했어."
마주 본 얼굴은 아까와 달리 희고 깨끗했다. 뺨에는 작게 긁힌 듯한 상처가 있었지만, 표피에 살짝 흠집이 난 정도는 암흑가에서는 상처로 치지도 않는다.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일 필요도 없이 금방 나을 상처였다.
오다는 우선 수건으로 다자이의 머리를 감싸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았다. 감싸 안은 다자이의 몸이 차가웠다.
"찬물로 씻은 건가?"
"응. 피 때문에."
옷에 묻은 피가 전부가 아닌 모양이었다.
"네 피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까도 말했잖아, 오다 사쿠."
다자이가 고개를 젖히며 오다를 마주보았다. 어두운 조명 탓에 새카맣게 보이는 눈이 오다를 깊숙이 들여다 보았다.
"자네가 그렇게 볼 정도의 부상은 없었어."
어쩐지 그 눈을 마주하기가 어려워져, 오다는 수건을 올려 베일을 씌우듯 다자이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수건 밑에서 웃음 소리가 났다. 그는 그 상태로 다자이를 구석으로 데리고 가 책장에 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기를 닦았다.
타인의 마음을 맑은 물속처럼 읽는 그는 오다의 생각 역시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자격이 없고, 이것은 주제 넘는 생각이라는 것은 오다도 알았다. 그러나 부모를 잃고 전장에 버려진 아이들을 내버려두지 못했듯, 살아갈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자꾸만 피안으로 떠나려 피비린내 나는 곳을 찾는 친구 역시 두고 볼 수 없었다.
해외의 신화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여섯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포승으로 괴물을 속박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처럼, 다자이를 이땅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는 현세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오다는 생각했다. 그래도 그는 언젠가, 누군가 다자이를 이 세상에 발붙일 수 있게 만들어주기를 바랐다. 그가 읽은 책처럼, 아직 보지 못한 세계를 알려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오다는 수건을 거뒀다.
품안에서 무고無故한 향기가 났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