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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온 후 / 유지 (@__yujisama) / 오다자

  • (雨前) : 비가 내리기 전

 

 

세상은 비가 오면 끊임없는 적막에 빠져들었다. 그 어떤 소리마저도 쏟아지는 빗줄기와 함께 흘러내려 버리는 모양이었다. 세상은 비가 오면 끊임없는 정적에 녹아들었다. 사고율은 다른 날보다 배로 뛰었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밖에 잘 나오려 하지 않았다.

 

레인버스.

 

이런 현상이 과연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코하마를 비롯한 세상은 비가 오는 날이면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비가 오는데도 빗소리조차 들리지를 않았다. 그런 지독한 날에 들을 수 있는 소리라곤 오로지 자신의 목소리와, 흔히 운명의 상대라고들 부르는 상대의 목소리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교육을 시켜 놓는다거나, 핸드폰에는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 예보를 알려 주는 시스템이 기본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등의 모습을 보면 이 현상은 꽤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듯했다. 적어도 수십 년은 되었을 것이다. 다자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억도 안 나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비 오는 날에는 외출하지 마라'라는 말을 들어온 건 다자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저 지금, 다른 이들과는 달리 비 오는 날이면 특히나 더 외출을 좋아하는 아이로 성장했을 뿐이지.

 

다자이는 비 오는 날을 싫어하면서 좋아했다. 그리고 또한 지루해하면서도 즐겼다. 어느 누구와도 음성으로는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나눌 수 없다는 점을 귀찮아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위험에 빠지게 되는 순간을 짜릿하다고 느꼈다. 다자이는 밀려오는 따분함에 읽던 책을 덮고 근처 테이블 위에 대충 던졌다. 소리가 없다. 책과 테이블이 부딪치며 나야 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자이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비가 오기 시작했나 보다.

 

챙겨서 나온 우산은 펼치지도 않고 무작정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아니나다를까 빗방울이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이 이다지도 흐린 것을 보면 금방 그칠 비는 아닌 것 같았다. 다자이의 머리카락부터 시작해 어깨고 바짓단이고 전부 적시고 있는 이 빗방울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다자이는 어깨가 특히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가볍게 걸어다녔다. 저번에는 폭우 속에서 쏘다니다가 차에 치일 뻔했고, 그 저번에는 급커브를 한 오토바이에게 치일 뻔했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항상 심상치 않은 기세로 비가 오는 날 밖에 나가 있으면 다자이는 꼭 죽음의 순간을 마주하곤 했다. 오늘도 그것을 기대했다. 하늘 위로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키곤 잠시 근처 벤치에 앉았다. 이미 젖을 대로 젖은 몸이 잔뜩 무거웠다. 그나마 이곳은 바로 뒤에 크게 자라 있는 나무가 빗줄기를 막아 주었기 때문에 잠시나마 자신의 몸을 때리는 빗방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자이는 그 상태 그대로 가만히 앞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말했다.

 

"무음이네."

 

이런 날은 모순 그 자체라고 다자이는 생각했다. 우스운 얘기지만, 다자이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통해 직접 빗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 지금은 비가 내리는 하늘 아래에 있는데도 말이야. 핸드폰이든 카메라든 기계를 통해 촬영되고 녹음된 빗소리만을 들어봤을 뿐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면서 빗소리 한 번 직접 못 들어본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더 어이가 없었다. 더 우스운 얘기를 하자면, 몇몇 사람들은 빗소리를 만끽해 보고 싶다며 고기를 굽기도 했다. 빗소리와 고기 굽는 소리는 비슷하다니까. 그렇네. 꼴사납네, 하며 중얼거렸다.

 

조금 서늘해진 몸뚱이를 일으키곤 다자이는 자신의 옷을 말아쥐어 물기를 짜내고서야 드디어 우산을 펼쳐 다시 빗속으로 몸을 들였다.

 

루팡에 갈 생각이었다. 안 지는 얼마 안 됐는데 꽤 마음에 들어 자주 찾고 있는 바였다. 길을 오래 걷지 않아 그곳으로 통하는 입구를 찾았다. 우산을 몇 번 털어낸 뒤 접고선 걸을 때마다 끼익거리는 소리가 나는 계단을 하나씩 밟아 내려갔다. 완전히 바 안으로 들어와서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가게 안을 가볍게 떠도는 담배 연기도 슬슬 익숙해질 참이었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자신이 항상 앉는 곳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도 손님이 있나, 하고 의아해질 때쯤에 자신과 똑같이 젖어 있는 옷을 보고 다자이는 속으로 납득했다. 비를 피해 아무 곳이나 들어온다는 게 이 바였던 모양이지. 말 없이 다자이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 바에 다닌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아서 호기심의 이유로 모든 메뉴를 한 번씩 마셔 보는 중이었기에, 아직 특별히 정해 두고 마시는 게 없는 다자이였다. 바텐더는 다자이에게 종이와 펜을 건네주었다. 음식점이든 주점이든 대형마트든 가리지 않고 모든 곳에는 비가 올 때를 대비해 종이와 펜이 항상 배치되어 있었다. 이 레인 시스템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불편하지 않은 것이었다. 다자이는 종이 위에 증류주를 적어 바텐더에게 내밀었다. 이내 바텐더는 가볍게 웃더니 몸을 돌려 다자이에게 건네줄 증류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주문한 것이 나올 때까지는 완벽한 정(靜)이었다. 자신의 옆에 앉은 사내는 누가 봐도 처음 온 것이 티가 나는 모양새로 멀뚱히 앉아만 있었다. 다자이는 잔이 나올 때까지 천천히 그 사내를 관찰하기로 했다. 붉은 머리카락, 바다를 담은 듯한 눈동자, 퍽이나 거슬리는 수염들. 눈동자를 위아래로 조금씩 움직여 훑었다. 애매한 저 재킷 색은 뭐지? 그 안에 하얀색 세로 줄무늬가 있는 검은 셔츠, 그리고 또 애매한 녹색의 바지…… 참 이해 못할 패션이군. 다자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턱을 괴었다. 사내는 티가 분명히 나는 다자이의 시선에도 눈길 조금 주지를 않았다. 험궂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과묵한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등등의 생각을 하다가 다자이는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자신답지 않은 짓을 하고 있었다. 그 새에 나온 잔을 건네받고 바텐더에게 고개를 꾸벅인 다자이는 유리잔 가장자리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다시 남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 사람. 그렇게 증류주 한 모금이 다자이의 목구멍 너머로 흘렀다. 순간 다자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우와, 써."

 

연신 입맛을 다시며 증류주의 맛을 되새기던 중에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그 사내였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저런 표정까지 짓고서 바라볼 정도로 자신의 표정이 우스웠던 건지, 다자이는 지지 않고 그 사내와 눈동자를 마주했다. 사내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내리쳤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까지 속으로 중얼거리던 다자이에게 대뜸 말이 건네졌다.

 

"저기."

 

'말이 건네졌다.'라고? 다자이는 덩달아 눈을 크게 뜨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입에서는 틀림없이, 선명하고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자이는 뒤늦게서야 방금 그 사내처럼 주위를 막 둘러보다가 유리잔을 흔들어보았다. 찰랑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내와 다자이 사이에서는 깊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니까, 다자이는 이제껏 살아오며 처음으로, 비 오는 날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흔히들 말하는 운명의 상대였다.

 

 

 

 

 

  • (雨點) : 빗방울 자국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제 괜히 나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눈을 뜬 다자이는 그런 생각에 파묻힌 채로 겨우겨우 셔츠 한쪽 구멍에 팔을 집어넣었다. 비가 오는 날에 대화를 할 상대가 생겼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었다. 운명의 상대가 같은 요코하마 안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할 뿐이었다. 평생을 우중 적막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 굉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자이는 그 사실을 떠나 뭔가 허무함을 느꼈다. 이유를 따져보자니 지나치게 놀란 탓인 듯했다. 어제의 자신을 후회하든 말든 남자에게 흥미가 가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셔츠 깃 아래로 넥타이를 두르며 어제 그 사내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오다 사쿠노스케."

 

어이없는 일이었다.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든다 싶었더니 그 소문 많은 말단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닌 기묘한 마피아, 라는 긴 수식어와 함께 '오다 사쿠노스케'라는 이름은 수도 없이 들어보았다. 그게 그 남자일 줄이야. 다자이는 준비를 마치고서 집을 나오며 자꾸 생각했다. 어제 바에서는, 양쪽 다 당황에 젖어 그다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을 뿐더러, 오다가 먼저 이름을 밝히자마자 다자이는 같은 포트 마피아 소속이라는 사실에 자신의 이름조차 말해 주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한심한 꼴이었다. 건물로 향하면서 다자이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부하 한 명에게 하급 구성원인 오다 사쿠노스케를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와 달라는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오다는 지금 이 상황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분명 어제 바에서 운명의 상대……라고 부르기도 미묘한 사람―앳된 얼굴인 것이 분명 자신보다 훨씬 어린 소년임이 분명했다. 그런 아이가 제 운명의 상대라니 오다는 머쓱하기 짝이 없었다.―을 만났고, 하지만 금방 헤어지고 말았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기 무섭게 호출을 받아 어느 집무실로 끌려가더니 내던져지듯 도착한 방 안에는 어제 그 소년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어제 그대로 그 어린 얼굴이었다. 오른쪽 눈에 붕대, 그뿐만이 아니라 목부터 시작해 팔에 둘러진 붕대를 보아 추측이건대 몸 전체 둘러져 있을 것이 뻔했다. 오다는 옷 매무새를 몇 번 고치고선 제대로 자세를 잡아 섰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든 이 상황에 녹아드는 것이 급선무였다. 오다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어제 그 소년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어서 오게, 오다 사쿠노스케. 이렇게 만날 줄은 또 몰랐지."

 

오다는 그 소년의 말이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힘들어서 삼 초 정도 텀을 두다가 짧게 네, 라며 답했다. 소년은 흥미로운 것을 구경하듯 턱을 괴며 오다를 응시했다.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려도 보다가 이내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올리며 웃었다. 소년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어제 인사를 못하고 가 버려서 말이야."

 

"네."

 

"다자이 오사무라네."

 

오다는 꽤 놀랐다. 같은 소속의, 심지어는 그 소문 무성한 유력한 차기 간부 후보였단 말인가. 사실 꽤가 아니라 많이 놀랐지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기껏 해 봐야 속눈썹 한 가닥 떨린 것 정도. 그 뒤 오다는 재빨리 머리를 어떻게든 굴려 이 소년이 자신을 왜 불렀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이렇게 된 거 앞으로 잘 지내 보자? 아니면, 자네 같은 사람이 내 운명의 상대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니 죽어줘야겠어? 오다는 눈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등 뒤로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지금 자세가 어쩐지 힘겨워질 때쯤 다자이는 다른 부하들에게 까딱이며 손짓했다. 오다의 뒤로 두어 명 정도 서 있던 부하들은 그 손짓에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 집무실 안에는 오다와 다자이뿐이라는 뜻이었다. 다자이는 흐음, 하고 작은 소리를 흘리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오다에게 다가갔다. 오다는 또 다시 티나지 않게 움찔했다. 오다에게로 가까이 다가온 다자이는 말했다.

 

"오늘 오후에 비가 온다는 모양이야."

 

"그렇습니까."

 

그때 다시 이곳에 오게나. 이야기를 나누자. 그 말을 끝으로 오다는 집무실을 나왔다. 솔직히 말하면 잔뜩 겁먹었다. 비가 오는 시간에 대화를 하자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새어나가선 곤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나눠야 할 이야기가 뭘까. 오다는 뻣뻣한 몸을 움직여 걸었다.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원했다면 원했을 운명의 상대를 이제서야 만났는데 로맨틱하거나 설레는 감정은 일절 없이 두려움만 앞섰다.

 

꼭 고통스러운 시간은 이렇게 빨리 찾아오곤 했다. 네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창문 너머로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보였다. 오다는 작게 숨을 내쉬며 그 경치를 구경하다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정확히 세 시간 사십육 분 전에 몸을 담았던 곳에 가야할 때였다.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저 건너편에서는 부대 하나가 통째로 방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임무를 가야 할 참이었나 보지. 그런 때에 비라니 지지리도 재수가 없는 듯했다. 오다는 일부러 느리게 발걸음을 뗐는데도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속으로 숨 한 번 내쉬고는 아까 그 문 앞에 섰다. 오다입니다. 하고 목을 울리자 안쪽에서 들어와, 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 오는 중에 정말로 대화가 통한다니 오다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다자이는 이번에는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다. 방 중앙과 구석 그 가운데쯤에 휴식용으로 놓아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오다를 보고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다자이는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바로 옆에 앉으라는 걸까, 그래도 되는 건지. 오다는 몇 초 머뭇거리다 다자이의 옆에 앉았다. 다자이는 아예 오다를 향해 몸을 틀어 앉고서 그를 불렀다.

 

"사쿠노스케."

 

"네."

 

다자이는 얕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완벽한 정적 속에서 웃음소리만이 들리니 그게 꽤 떨떠름한 기분이라고 오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박수를 쳐도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이 사람 목소리만은 선명하다는 게. 얼핏 생각하면 그저 깊게 눌러쓴 헤드셋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다는 착각도 들었다. 다자이는 고개까지 젖혀가며 웃어대다가 오다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편하게 대하게나. 어제는 안 이랬잖아."

 

"……으음. 다자이?"

 

"그래, 그렇게."

 

만족스러운 듯 다자이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었다. 흥미를 감추지 못한 눈꼬리가 살랑거렸다. 아까 짧게 얘기해 봤을 때도 느꼈지만 지금까지 만나 본 적 없는 사람의 유형이다. 눈치가 없는 건지 둔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 건지. 다자이는 후자인 것 같다고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사람이 지나치게 순수했다. 순수하다는 수식어를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정말로 순수했다면 이런 곳에는 몸을 들이지도 못했을 테니, 어쨌든 다자이는 이 오다 사쿠노스케라는 인물에게 흥미를 느꼈다. 눈동자만을 굴려 집무실 안을 한 바퀴 훑어보던 오다는 다자이와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했다. 그 모습에 다자이는 다시 웃었다.

 

다른 사람이 오다를 부르듯 일반적인 호칭을 가지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다지 운명의 상대이니 뭐니 하는 것을 의식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 아니지만, 아무튼 그랬다. 사쿠노스케라고 부르는 건 너무 명료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다라고 부르는 건 더욱이 딱딱했다.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던 다자이는 이내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반짝였다. 오다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오다 사쿠."

 

이게 마음에 드는군. 오다 사쿠. 그렇게 불러도 되지?

 

 

 

 

 

  • (過雨) : 지나가는 비 또는 잠깐 오는 비

 

 

그다지 악의를 품은 짓은 아니었다. 겨우 설명해 봤자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 짓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닌 기묘한 마피아'라는 말 때문에 그 직위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어보았다. 거기서 나온 생각이었다. 말단이면 말단인 거지, 과연 그 오다라는 남자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최하급 구성원에 속해 있는 이유마저 붙어 있는 거냐고. 오다와 전보다는 나름 친해지고, 그가 어떤 남자인지 대강 판단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다자이는 권총을 들었다.

 

권총을 잡은 것은 비 오는 날이었다. 운명의 상대라고 비 오는 날에 그 상대가 내는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상대의 '목소리'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오다가 아무리 유리창을 깨뜨리고 물건을 부수고 책상을 두드려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 한 다른 소음들은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다자이는 그것을 써먹고자 했다. 루팡으로 가는 길에, 일부러 오다의 뒤에서 걸으며 조금은 약해진 빗줄기를 맞았다. 그의 이능력은 '5~6초 후의 미래에 닥칠 자신의 위기를 보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오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목숨이 위협당할 만큼의 위기가 아닌 이상은 특별히 발동되지 않는 듯했다. 또 다자이는 그것을 이용하고자 했다. 이능력이 발동되지 않을 만큼 미미한 위협을 가하면 단순히 오다 사쿠노스케만의 전투 능력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다자이는 주머니 속의 권총을 제대로 쥐어 잡고는 서서히 총을 빼 들었다―라고 하기도 전에 권총이 도로 위를 나뒹굴었다.

 

"뭐 하는 짓이지, 다자이?"

 

다자이의 안면 근육이 순간 확 굳었다. 분명 지금은 비가 오는 중이었다. 다른 소리들은 들리지 않을 게 당연했다. 그런데도 오다는 다자이가 완전히 권총을 빼내기도 전에 그것을 쳐내며 다자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떻게? 꽤나 치밀하게 계산해 놓은 계획이 일 초만에 떨어지자 다자이는 말 그대로 헛웃음을 지었다. 아직은 친구 단계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눈 앞의 오다는 잔뜩 경계 중인 위험한 인물에 불과했다. 다자이는 갑자기 붙잡혀 버린 손목이 얼얼하다고 느꼈다. 아직 자유로운 나머지 한쪽 팔을 마저 들어올리며 항복의 제스처를 취하곤 능글맞게 웃어보였다.

 

"자네를 시험해 보고 싶었거든."

 

속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 남자에게만은 솔직하고 싶었다. 오다는 그 말을 듣고서 눈을 깜빡이는 것에 그쳤다. 화낼 법도 한데 아무 말도 없이 다자이의 손목을 놓아주며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다자이는 오다의 소매를 잡으며 물었다.

 

"화내지 않는 건가?"

 

"화나지 않았으니까."

 

흐응. 다자이는 목을 울리며 만족스러운 대답이라는 듯 웃었다. 오다의 뒤를 쫓아 마저 걸으며 다자이는 생각했다. 정말 대단하군.

 

하지만 다자이 오사무, 그가 겨우 한 번의 실험으로 만족할 남자였던가? 오다는 눈치채지 못하게 부하들을 이끌고 무방비 상태의 오다를 덮치도록 했지만, 그것조차도 일 분이 지나지 않아 상황이 종료되고 말았다. 다자이는 확실히 부하들에게 진심으로 덤비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이 보기 좋게 무너졌을 뿐이다. 오다는 기습으로 달려든 다자이의 부하들의 공격을 전부 피했다. 몸놀림부터가 남달랐다. 날아오는 총알의 궤도를 미리 알고 몸을 꺾어 상대의 손목을 비틀었고, 상체를 낮게 숙여 안쪽으로 파고들어 팔꿈치로 명치를 가격했다. 마치 길 위에서 춤을 추듯 한 바퀴 크게 벽을 타고 돌아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으며 더 이상은 총을 쥘 수 없게 손가락 몇 개를 부러뜨려 놓는 것에 그쳤다. 죽이지 않으면서 최소한 자신의 위험을 제거해 놓는 방식이었다. 다자이는 그러는 쪽이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고 중얼거렸다. 종내에는 결국 오다가 그들을 전부 제압했지만 그러면서도 단 한 명 죽이지 않았다. 그의 신념은 사실이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본 그 순간부터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진심으로 실력을 발휘하는 날에는 모두가 총을 뺄 틈도 없이 살해당할 거라고.

 

 

 

 

 

  • (零雨) : 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비

 

 

그때 마치 기적과도 같은 만남이 있은 후로 벌써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키도 조금, 아니, 훨씬 더 크고, 얼굴도 아주 살짝 더 갸름해지고, 결론은 성장했다는 것이었다. 다자이는 더 이상 비 오는 날이라고 우산도 쓰지 않고 흠뻑 옷을 적시며 돌아다닌다거나, 그렇게 길을 걸으며 죽음을 재촉한다거나 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못했다. 오다가 있기 때문이었다. 비 오는 날에도 함께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눌 상대가 생겼기 때문이라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다자이는 잠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유라면 한 명이 더 추가되어야 했다.

 

"다자이 군."

 

때마침 그 한 명이 왔다. 사카구치 안고였다. 그와는 용두 항쟁이 한참인 중에 만났다. 그때만 해도 회계사 수습이었던 사카구치는 이제 와서는 정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번에는 또 며칠씩이나 철야를 했는지 다크서클이 눈 밑으로 길게 내려앉았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다자이가 친절히 평소에 안 하던 짓―의자를 빼 주어 편하게 앉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해 주자 사카구치는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러더니 도로 의자를 집어넣고서 다시 빼내는 수고까지 하며 의자에 앉는 것이 아닌가. 다자이가 부루퉁한 얼굴로 무어라 웅얼거리기도 전에 사카구치는 숨을 푹 내쉬었다.

 

"답지 않은 호의 베풀지 마세요. 당신은 의자 빼 주는 것조차 꿍꿍이 있는 걸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의자를 도로 넣었다 빼서 앉은 건가?"

 

"뭐…… 의심스러워서요."

 

매정하네! 다자이가 푸념이라도 뱉듯 쨍알거리더니 이번에는 오다에게로 몸을 획 돌려 쫑알거렸다. 방금 봤지, 오다 사쿠? 안고가 날 이런 취급을 하는데도 보고만 있을 건가? 응? 오다는 그런 다자이를 쳐다보는 것조차도 미루고 증류주 한 모금 목으로 넘기는 데에 바빴다. 그 꼴에 다자이는 단단히 토라졌는지 스스로 팔짱을 끼고서 입술을 비죽였다. 그제야 오다가 잔을 내려 놓으며 다자이 건너 사카구치에게 속삭였다. 어떻게 좀 해 봐, 안고. 다자이가 삐쳤잖나. 사카구치는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가방을 한쪽으로 밀어놓고선 오다에게 말을 건네듯 다자이에게 말했다.

 

"오늘 같은 날은 특히나 두 분이 부럽더군요. 오전에 잠깐 비가 왔었잖아요. 그때가 미팅 시간이었거든요. 모든 대화를 메시지로 나누게 되었으니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죠, 다자이 군?"

 

다자이는 다시 몸을 휙 돌려 사카구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단순한 남자라니…… 사카구치는 새는 웃음을 흘렸다. 다만 다자이는 일부러 사카구치를 약올리려는지 앉은 채로 상체를 뒤로 눕혀 오다에게 가까이 붙어 기대면서 반쯤만 뜬 눈으로 혀를 쏙 내밀었다.

 

"참 부럽겠지."

 

끓어오르려던 것을 참았다. 사카구치는 마구 쏘아보려다가 다자이 대신 오다를 노려보았다. 오다는 그 따가운 시선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떻게든 대화가 이어질 수 있도록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안고는 아직 못 찾은 건가?"

 

"네. 딱히 관심 있는 건 아니지만, 비 오는 날이면―."

 

사카구치의 말은 순식간에 음소거 처리가 되어 뚝 끊겼다. 아무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거리는 꼴로 보일 뿐이었다. 또 다시 비가 오나 보다. 장마철이라고 쉴 틈도 없이 빗줄기가 쏟아져 댔다. 다자이와 오다가 한숨을 내쉬자 그 반응을 보고 사카구치도 눈치를 챘다. 또 비입니까. 분명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다자이와 오다에게는 사카구치의 중얼거림이 들리지 않았다. 앞서 '그런 이유라면 한 명이 더 추가되어야 했다.'라고 말한 이유는 우중에 사카구치의 목소리 또한 들려서가 아니었다. 사카구치 안고, 그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웃으며 떠들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이기 때문이었다. 오다 또한 그렇게 느끼고 있을 테다. 그래서 사카구치는 비가 오기 시작한다고 이 자리를 뜨지 않았다. 다자이는 조용히 사카구치를 바라보다 작게 키득이며 입을 열었다.

 

"바보."

 

사카구치는 다자이의 입술을 응시하다가 발끈해선 목소리를 높였다…… 라고 말해도 들리지 않지만.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려다가 괜히 주위를 의식해선 자리에 앉아서 왝왝거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사카구치가 무어라 따발총처럼 떠들어대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자이는 땡그랗게 뜬 눈으로 오다를 돌아보았다.

 

"안 들릴 텐데 어떻게 알아들었지?"

 

겨우 두 글자밖에 되지 않는 것 정도는 입모양으로 쉽게 알 수 있을 텐데, 라고 오다는 생각했다. 다자이의 물음에 답해 줄까 고민하다가 그저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이 바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사카구치는 도로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연신 문질러 대다가 테이블 가장 끝쪽에 놓여 있던 종이 위에 펜으로 글씨를 끄적이곤 다자이와 오다에게 내밀어 보여주었다. 아직 업무가 덜 끝난 것도 있고, 오늘은 가볍게 만날 생각으로 온 거라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정갈하고 딱딱하게 적힌 문장을 모두 읽은 오다와 다자이는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약간의 아쉬움을 내비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밀어두었던 가방을 챙기곤 사카구치는 금세 계단을 올라 바를 바져나갔다. 다자이는 다시 한 번 물끄러미 눈을 깜빡이다 오다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안고가 삐쳐서 가 버린 건 아니겠지? 오다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자이와 오다는 사카구치가 간 이후로 오래 머물지 않았다. 지상으로 나오니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인해 올라온 땅 냄새가 훅 풍겼다. 습하기도 습하고, 끈적하고 찐득하고. 최대한 비를 덜 맞기 위해 길 바깥쪽에 붙어 서 있던 다자이는 오다를 힐끗 쳐다보았다. 우산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으음, 고민하는 소리를 약하게 흘리다가 겉에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으며 다자이는 오다를 불렀다.

 

"오다 사쿠."

 

오다는 대답 대신 다자이의 손에 들린 코트를 보고 곧장 그것을 건네받았다. 자신과 다자이 위로 넓게 코트를 드리우며 빗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다자이는 그 모습에 장난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하도 익숙해진 덕에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무언가를 진행할 수 있다는 건 예상보다도 훨씬 심장이 간질거렸다. 신호도 달리 맞추지 않고 이윽고 오다와 다자이는 그 빗줄기 안으로 몸을 내던졌다. 목적지도 따로 얘기하지 않았지만 둘의 발걸음은 알아서 다자이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주 이랬다. 비가 오는데 우산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날이면 한 명의 코트를 뒤집어쓰고서 다자이의 집으로 가는 것 말이다. 이쯤이면 일부러 우산을 안 챙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다자이는 그랬다. 다자이는 오다 또한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다.

 

웅덩이를 몇 차례나 밟으며 뛰어온 탓에 구두코는 번들거렸고 바짓단은 온통 젖어버렸다. 그나마 코트로 가리며 온 게 다행이지만, 코트의 결말은 처참했다. 다자이는 비에 흠뻑 젖어 무겁기까지 한 코트를 쥐어짜 물기를 빼내곤 남은 빗물이 빠질 수 있도록 다용도실에 걸어두었다. 오다는 이제 다자이가 가져와 주지 않아도 알아서 옷가지를 꺼내 갈아입었다. 다자이도 이어 옷을 갈아입고서 소파 끝쪽에 몸을 뉘였다. 당장 샤워가 하고 싶을 정도로 온몸이 눅눅했지만 굳이 이런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발치에 무게가 느껴졌다. 오다가 소파 반대편 끝쪽에 앉은 것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자이는 노곤한 눈꺼풀을 연신 열어젖히며 아무 무늬도 없는 천장을 관찰하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오다에게 할 말이 있었다. 무음 속에서 다자이는 말을 꺼냈다.

 

"우리는 계속 이대로 지내는 건가?"

 

"……?"

 

오다는 무슨 말인지 통 이해 못한 얼굴로 다자이를 바라보았다. 이 둔하고 눈치 없는 남자에게 뭘 기대한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어이가 없는 듯 다자이는 어깨를 작게 떨며 웃었다. 누워 있던 상체를 느릿하게 일으키며 조금 더 담담하게 계속해서 목을 울렸다.

 

"보통 운명의 상대랑은 아예 연인의 관계가 되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잖나. 우리는 계속 친구 관계로 남아 있을 거냐는 소리야."

 

뱉어놓고는 괜히 말했나 싶어 다자이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신경 쓰지 말라며 덮어버리기도 전에 오다가 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대답보다는 역질문을 했다.

 

"연인이 되면 무슨 일들을 하지?"

 

"글쎄. 같이 놀러가고, 얘기를 나누고, 집에서 자기도 하고…… 아, 손도 잡고. 그렇지 않을까?"

 

"그 정도라면 지금과 딱히 다를 것도 없지 않나? 스킨십을 제외하면 말이야."

 

예상 외의 답변에 다자이는 놀란 티를 감출 생각 없이 눈을 끔뻑였다. 오다의 순수한 얼굴에 더욱 그랬다. 역시나 오다 사쿠, 자네답군. 속으로 말을 삼키며 다자이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아. 짧은 수긍과 함께 다자이는 짓궂게 주먹으로 오다의 어깨를 툭 밀어내고서 도로 소파 위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딱히 어떤 관계를 원한 건 아니지만, 역시 오다 사쿠는 오다 사쿠일 뿐이라고 해야 하나. 쓸데없이 관계를 가져와 정의해 봤자 지금과 달라질 건 없다, 라는 건 즉 지금 이 상태로도 연인과 비슷한 사이라는 의미였다. 후후, 다자이는 특유의 웃음을 흘렸다. 묘하게 머릿속이 후련해졌다.

 

 

 

 

 

  • (連雨) : 연일 계속하여 내리는 비

 

 

다자이의 집은 그다지 '사람이 생활하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집이었다. 생활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들이 놓여 있는 것으로 그치는 곳이었다. 냉장고에는 사케 세 병, 생수 두 병. 오락이나 유흥을 즐길 수 있을 만한 것들은 전혀 없었다. 컴퓨터도 TV도 없고, 구석에 겨우 자리잡은 노트북은 업무용일 뿐. 무엇도 없이 식탁과 테이블과, 그것과 세트인 의자 몇 개와 침대 하나가 전부였던 이 넓은 집에 차차 무언가가 들어오기 시작한 건 오다를 만난 후부터였다. 딱히 오다가 특별한 요구를 한 건 아니었지만, 비가 올 때마다 자신의 집에 들이게 될 테니 이왕이면 좀 더 즐기다 갈 수 있을 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다자이가 생각한 것이지. 여전히 휑한 집이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큰 발전이었다. 주방에는 오다가 좋아하는 카레가 쌓여 있고, 방 안쪽 책꽂이에는 오다가 지나가다 흥미를 보인 책들도 꽂혀 있고. 솔직히 말하면 오다와 함께 동거하기 위해 만든 집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랬다.

 

어김없이 비가 너무 많이 왔다. 빗줄기가 조금 수그러들까 싶으면 또 다시 줄기차게 쏟아져내렸다. 지나친 비라고 정전이 되어버린 집 안은 너무 깜깜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거기에 빛조차 없다고 생각하면 그건 또 나름대로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자이는 무섭지는 않았다. 손목에 오다의 온기가 닿고 있기 때문이랴, 빛이 있든 없든 다자이는 꽤 행복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아쉬운 점이라 하면 오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어쨌든 오다와 맞닿아 있는 것은 퍽 기쁜 일이었다.

 

"오다 사쿠, 나 놓으면 안 된다네."

 

"음, 네가 어둠을 무서워했던가?"

 

"그건 아니지만."

 

다자이는 장난기 묻은 웃음소리를 연신 흘리다가 손목을 가볍게 붙들고 있던 오다의 손을 떼어내고 자신의 손과 겹쳐 잡고는 살며시, 천천히,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깍지를 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자이는 오다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계속 침대 시트 위에 누워만 있느라 허리가 조금 뻐근한 참이었다. 다자이는 드러나지 않게 속으로 웃고는 몸을 일으켜 옆의 오다 위로 뭉근하게 올라탔다. 겹쳐 잡은 오다의 손끝이 희미하게 움찔할 뿐 오다는 특별한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 반응만으로 충분했다. 다자이는 그대로 오다의 손을 더욱 끌어다가 자신의 허벅지 위에 얹어주었다. 너무 따뜻했다. 오다에게 다자이의 몸은 너무 차갑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무언가를 말하지 않았다. 알고는 있다고 하지만 역시 반응 없네. 그렇게 중얼거릴 때쯤 다자이가 침대로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오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이었다.

 

"술이나 마시러 갈까, 오다 사쿠."

 

"……음, 그러지."

 

시시하긴. 다자이는 아쉬움이 한껏 묻어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오다의 위에서 내려왔다. 일부러 꾸물거리며 벗어두었던 재킷을 걸치곤 구두 속으로 발끝부터 밀어넣었다. 현관을 빠져나오자 뒤로 오다가 따라나왔다. 얼핏 잇새로 웃음을 흘려버린 다자이였다. 어서 가자, 오다 사쿠.

 

―라는 꿈을 꾸었다. 열한 시였다. 오다는 방금 막 잠에서 깬 사람 같지 않게 비교적 차분한 얼굴로 일어나 앉았다. 너무 생생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다자이의 집에 있었던 것만 같은데 아무리 둘러봐도 좁디 좁은 자신의 집이었다. 사실 어디서부터 꿈이었는지조차 그 경계가 모호했다. 오다는 묘하게 좁혀진 미간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비척비척 일어섰다. 왠지 누군가가, 아마 다자이가 자신을 부른 것 같아 술집에 가기로 했다.

 

비 내린 직후라 그런지 공기가 온통 습하고 더웠다. 요코하마의 밤길이 언제나 그랬듯 안개라도 낀 것처럼 시야가 흐렸다. 오다는 몇 번의 물웅덩이를 찰박이고 나서야 루팡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정말 신기하게도 다자이는 이미 카운터석에 앉아 있었다. 다자이는 오다가 왔음을 알아채고 만지작거리던 술잔에서 몸을 떨어뜨리며 오다에게 인사했다.

 

"여, 사쿠노스케."

 

다자이의 어조는 마치 기쁜 것처럼 들렸다. 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오다 또한 기뻤다. 오다는 다자이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곤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사카구치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자이와 오다의 틈에 섞여들었다.

 

이후로 일이 터지는 것은 전부 시간 문제였다. 다자이는 그 모든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리라.

 

다자이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고, 오다는 곧 모리 오가이의 호출을 받았다.

 

 

 

 

 

  • (陰雨) : 오래 내리는 궂은비

 

 

"안녕하세요. 먼저 한잔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같은 곳이라는 사실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런 날이었다. 여어, 눈을 떴나, 오다 사쿠. 기분은 어때? ……50년간 겪을 숙취를 한꺼번에 경험한 기분이야. 그런 대화를 나눈 게 겨우 며칠 전이었다. 또 미믹의 우두머리와 만나서 싸웠던 것도. 유독 피곤한 날들뿐이었다. 오다는 소리를 내어 주문하는 대신 한 손가락만으로 바텐더에게 신호를 주었다. 이윽고 다자이를 사이에 두고서 오다와 사카구치의 대화가 짧게 오고갔다. 연락 정도는 줘도 좋았던 거 아닌가? 미행하는 사람을 따돌리느라 말이죠. 오다는 납득하는 듯하면서도 쉽게 읽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다자이가 이어서 냅킨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도 오다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바 내부의 분위기는 평소보다도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잠입 조사원치고는 꽤 감상적인걸, 이라며 본론의 서두를 떼는 다자이의 목소리는 너무도 침착했고 또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욱 사카구치는 쓸쓸하게 웃었다. 어느 하나 즐거운 부분이 없었다. 얼핏 들어서는 언제나 나누었던 대화 같은데, 결국은 여느 때 없었던 것이었다. 즉, 안고는 2중 스파이가 아니라 3중 스파이였다는 건가, 하는 오다의 중얼거림에 다자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힐끗 시선을 돌린 다자이의 눈동자에는 이다지도 슬플 수 없는 표정의 남자가 담기고 말았다. 말없이 다자이는 아랫입술을 지긋하게 깨물었다가 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앞쪽에 내밀어진 당연히 유리잔은 부딪혀지지 않았다. 차라리 그러는 쪽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상황 속에서 잔이 부딪혔다가는 이 울렁이는 감각을 억누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카구치는 이미 반쯤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허황된 희망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아니면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심연 속에 눌러붙을 대로 눌러붙은 분위기 속에서 사카구치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온 이유는 우리의 변하지 않는 우정을 확인하기 위해서인가요?"

 

"그럴 리가."

 

즉답으로 이어진 다자이의 울림이 너무 냉랭했다. 아무렇지 않은 건지 그런 척을 하는 건지 모를 다자이의 입에서는 사카구치의 혹시 모를 희망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미믹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야. 알고 있었잖아? 오다는 조용히 들으며 생각했다. '알고 있었잖아?'라는 물음은 사카구치의 무언가를 짓이길 만한 말이었다고. 아니나다를까 사카구치는 이미 고개를 숙여 시선을 유리잔에 고정시킨 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상처받았겠지, 많이. 그렇게 느끼면서도 오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처를 받은 건 사카구치뿐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으니까.

 

사카구치는 유리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는 이내 다자이가 원할 만한 정보를 말해 주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오다에게로 질문을 던지기도 하면서, 간간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오다의 눈에 사카구치는,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날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서 모든 것을 얘기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나마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이야기의 주제가 되어주었던 정보가 고갈되었다. 자연스레 대화가 한 텀 끊겼다. 이내 이어지는 얘기는 단어 하나하나조차 차갑기 짝이 없었다. 다자이가 사카구치에게 자신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어서 사라지라는 말을 내뱉자 오다는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오다는 스스로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자꾸만 말을 하려다 말고, 또 삼키던 사카구치는 끝에 가서야 힘겹게 말을 꺼냈다.

 

"……언젠가 시대가 변하고, 특무과도 마피아도 체질이 변해 우리가 더 자유로워지면, 또 여기서 한잔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 이상은 말하지 마라, 안고."

 

"……."

 

"말하지 마."

 

사카구치가 한참을 고민하다 꺼낸 말은 아까 다자이가 밟아버린 희망의 파편이었다. 오다는 그나마 보존되어 있었던 그것을 완전히 꺼뜨리고 말았다. 다자이의 짓이 아니었다. 오다가 그랬다. 덕분인지 배로 상처받은 얼굴로 사카구치가 바 스툴에서 일어나 자리를 뜰 때까지,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은 공기에, 오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음이 잔 안쪽에 부딪치는 소리 한 번, 그리고 사카구치가 남겨 두고 간 사진 한 장. 오다가 그것을 들어 다자이에게 보여 주는 그 순간부터 세상은 다시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비가 왔다.

 

오늘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다자이의 코트를 두르고 물웅덩이를 밟아가며 뛰지 않았다. 다자이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빗줄기 아래로 오다가 먼저 몸을 던졌다. 다자이 또한 오다를 붙잡지 않고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다자이는 몇 년 만에 우산도 무엇도 없이 쏟아지는 비 그대로를 몸으로 받아냈다. 오랜만에 머리카락부터 어깨 그리고 바짓단 양말까지 젖어가는 감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오히려 찝찝했다. 그래서인지 이 밤은 평소보다 의미 없을 접촉이 짙었다.

 

처음에는 손끝이 가볍게 스치나 싶더니 곧 다자이는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오다와 손을 겹쳐 잡았다. 손등과 손바닥이 맞닿자 정전도 아닌데 불이라곤 전부 꺼진 집 안에서 다자이의 목소리가 묘하게 울렸다.

 

"상처받아서 그랬던 거지, 오다 사쿠?"

 

오다는 다자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사실이었다. 사카구치가 더 이상 상처받을까 봐, 라는 이유가 아니었다. 말을 고민할 새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자신의 그 두 마디는 순전히 본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신이 너무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오다는 대답 대신 손바닥과 손바닥이 만날 수 있게 손을 뒤집고는 조용히 깍지를 꼈다. 어둠 속에 익숙해진 눈은 불빛 없이도 시선을 마주칠 수 있었다. 오다는 원망 비스무리한 감정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전부 알고 있었지."

 

다자이는 그저 깍지가 껴진 손을 매만졌다. 이내 사실이라며 긍정했다. 이 남자에게만은 솔직하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했음이 분명했다. 오다 또한 화내지 않았다. 다만, 이번의 다자이는 오다에게 화내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이유를 알고 있으니까. 잔뜩 내려앉은 오다의 눈꼬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다자이는 물었다.

 

"후회는?"

 

"하지 않아."

 

오다의 머리칼을 타고 물방울 하나가 흘러 다자이의 손등 위에 떨어졌다.

 

"그러면 됐어."

 

 

 

 

 

  • (殘雨) : 비가 그칠 무렵에 조금씩 내리는 비

 

 

생각해 보면 오다의 머릿속은 사카구치가 바를 나간 그 순간부터 이미 망가져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다자이는 생각했다. 벗이라고는 하지만 워낙에 속을 알기가 힘든 사람이니까. 몇 년을 봐 왔는데도 완전히 감추려고 들면 그의 속마음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사카구치에게 던진 두 마디로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글쎄다.

 

급한 연락이 들려왔다. 오다가 부양하고 있던 고아들이 죽어버렸다고. 다자이는 그 말을 듣자마자 들고 있던 펜을 떨어뜨렸다. 부하의 뒷말은 물론 떨어진 펜을 차마 주울 생각조차 안 하고 당장 자리에서 뛰쳐나갔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더 듣지 않아도 미믹의 짓이었다. 초조해져서 빨라진 발걸음과 함께 이가 맞물려서는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카구치의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런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으니 오다의 상태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 소용은 없겠지만, 그를 붙잡아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자신이어야만 했다.

 

숨이 거칠게 터져나왔다. 양식점에서 막 나온 오다를 보고 다자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다의 걸음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다자이를 향해 돌아섰다. 다자이는 냉정한 척하며 말을 이어갔지만 되레 덜덜 떨리는 꼴이었다. 붙잡는 모습이 꽤나 처절했다.

 

"다자이인가. 왜 그러지?"

 

"오다 사쿠.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하지만 그만둬. 그런 짓을 해도……."

 

"그런 짓을 해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다자이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다자이는 점점 속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은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 입천장부터 바싹 말랐다. 이미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의 복수를 방해하려는 계획이 아니었다. 하지 말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자이가 이토록 조급하게 구는 이유는 오다의 선택이 너무나도 극단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그 선택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애를 쓸 때마다 오다는 되레 점점 더 벽을 세웠다. 다자이는 두려운 나머지 순간 오다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말았다. 오다에게서 건네받은 지도부터 그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마다 손끝이 덜덜 떨렸으나 티는 그다지 나지 않았다.

 

마지막 수단이라고 생각하며 다자이는 여태껏 숨겨 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봐, 오다 사쿠. 왜 내가 마피아에 들어왔는지 알아? 그 얘기를 묵묵히 듣던 오다는 겉으로는 변함이 없었지만 확실히 놀란 듯했다. 물끄러미 다자이를 바라보는 오다의 시선에게서는 그런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설득당했다’의 무언가는 없었다. 거의 무너져가는 심정으로 다자이는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면 무언가 살아갈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 사이에 짧은 침묵이 돌았다. 다자이는 오다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한 번 마주치자 오다는 방금까지 열심히 세워 놓았던 벽으로 다자이의 말을 되받아치듯 입을 열었다.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어."

 

다자이는 숨을 확 들이켰다. 이 순간의 종지부가 다가왔음을 뼈저리게 느껴서인지 온몸의 털이 곤두서며 소름이 돋았다. 오다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자꾸만 이어갔다. 임무라도 사람을 죽이면……. 다자이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다가 말하는 그 전부를 귓속으로 흘려보내고는 있는데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어떤 것도 이해된 채로 들어오지 않았다. 한 마디라도 더 건네 보려고 입술을 달싹거려 봤지만 마땅히 나올 것은 없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뿐이야."

 

마침내 그 종지부가 찍히고 말았다. 오다는 미련 없이 다자이를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그 미련은 모두 다자이가 지니고 있었으리라. 다자이는 거의 처량한 꼴로 오다에게 손을 뻗었다. 물론 손끝조차 닿지를 않았다. 절규에 가까운 부름에도 오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늘에서 천둥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오다 사쿠!"

 

다자이는 끝내 절망했다.

 

 

 

 

 

  • (如雨) : 내린 비가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없듯이 다시 만나기 어려운 이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다자이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속한 조직의 수령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무너지고 흐트러진 채였다. 떠올릴수록 화만 나는 그 수령과 지나친 시간 낭비를 했다. 어쩌면 보스는 그것조차 계획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역겨울 지경이었다. 그 혐오스러움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다시 피어오른 오다의 불씨가 너무 뜨거웠다. 오다 사쿠, 오다 사쿠. 제발 늦지 않기를, 오다 사쿠, 하며 속으로 몇 번이나 그의 이름을 불렀는지 모른다. 피를 잔뜩 흘리고서 바닥에 늘어져 있는 모습이 자꾸만 눈꺼풀 안쪽에 새겨진 듯 아른거렸다. 현기증인지 발이 자꾸 꼬이고 어지러웠다. 다자이는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서 뛰었다.

 

오다의 목적지였던 저택에 다다르고선 딱 한 번 숨을 골랐다. 정말 딱 한 번이었다. 주위로 넓게 펼쳐진 숲이라든가 나무라든지 현관에서부터 보란 듯 쓰러져 있는 미믹의 병사들을 구경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다행인 건 현관문을 따로 열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전투의 흔적인지 문짝 같은 것은 이미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다자이는 저택의 안으로 급하게 들어갔다. 오다가 어디 있는지 두리번거릴 필요 또한 없었다. 줄줄이 쓰러진 미믹의 병사들 전부 자신의 벗이 지나간 흔적이고 증거였다. 바닥에 뒹구는 수많은 시체들을 지나치며 다자이는 터질 것만 같은 가슴팍을 자꾸 눌렀다.

 

숨이 너무 모자랐다. 목구멍이 턱턱 막혀 왔다. 거대한 떡갈나무 문을 발로 차서 열고는 비슬비슬, 꼴에 겨우 정신을 붙잡고서야 그토록 보고 싶었던 친우를 만날 수 있었다. 거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다시 그를 불렀다.

 

"오다 사쿠!"

 

"다자이……."

 

다자이는 언제나 어깨에 걸치고 다니던 코트마저 떨어뜨리며 달려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급하게 오다의 등 아래로 손을 넣어 들어올리자 순간 손바닥에 따뜻하고 미끄러운 것이 묻어났다. 피였다. 다자이는 더 이상 덜덜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다의 가슴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피 웅덩이는 너무 컸다. 다자이는 고개를 푹 떨구고 몇 번 절레절레 내젓더니 오다를 책망하듯 실은 자신에게 무어라고 소리쳤다.

 

"오다 사쿠, 참 바보구나. 자네는 정말 엄청난 바보야."

 

오다는 반박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답지 않게 별다른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오다는 그래, 그렇게 답할 뿐이었다.

 

무도실 안은 바닥이고 벽이고 온통 새빨갰다. 눈이 뻐근할 정도로 붉었다. 천장 높게 달려 있는 샹들리에마저 빠알간 색으로 짤랑거렸다. 오다는 지칠 대로 지친 듯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다자이의 이름을 불렀다. 해 두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다자이는 여태껏 지은 적 없던 표정으로 그 말을 끊었다. 이 이상 오다와의 이별로 이어지는 것이 없었으면 했다. 안 된다며 그렇게 서글픈 얼굴로 한 번 오다를 말리더니 다자이는 모순된 면을 보였다. 아직 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니, 분명 살 수 있을 거야. 자신은 언제나 죽음을 추구하는 주제에 오다의 몸을 꼭 끌어안고서 삶에 대해 말했다. 대놓고 바스러지는 다자이를 보다 못해 오다는 그의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들으라고.

 

그제서야 다자이는 오다의 긴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자이의 독백에 관한 것이었다. 스치듯 말했던, 하지만 온전한 진심을 담았던 자신의 대사를 하나씩 끄집어내더니 오다는 친절하게 부정해 주었다. 오다의 목소리는 너무할 정도로 상냥해서 다자이조차 멈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친구가 죽어가는 때가 되어서야 다자이는 오다가 자신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신이 있다면 정말로 잔혹한 존재일 것이다. 늦은 깨우침이었다. 다자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말은 하지만 거의 울기 직전인 얼굴이었다. 한 가닥씩 떨리는 속눈썹을 무시하며 바로 앞의 오다에게 물었다.

 

"오다 사쿠…… 나는 어쩌면 좋지?"

 

오다는 슬슬 힘이 빠져가는 듯 보였다. 얼굴의 근육에서마저 힘이 사라졌는지 그 무서웠던 표정은 어디 가고 지나치게 부드러운 얼굴로 오다는 답했다.

 

"사람을 구하는 쪽이 돼라."

 

이제 와서 후회되는 것이 생겼다. 조금 더 빨리 이 사건의 모든 것을 알아차려서, 아이들과 사장님이 죽게 만들지는 말걸. 그 원망스럽기만 한 자신의 수령과 조금이라도 빨리 대화를 끝마치고 나와서, 아니, 차라리 허락 따위 구하러 갈 것 없이 바로 오다에게로 달려가 그를 구할걸. 애초에 이 운명을 바꿀 수 없었더라면, 며칠이라도 빨리 이 사람과 마주칠걸.

 

그 다음부터 나눈 대화는 잔인했다. 잊을래야 죽어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각인되고 또 새겨졌다. 오다가 코트 안쪽에서 담배를 꺼내고, 다자이가 성냥으로 담배 끝부분에 불을 붙여주고, 오다가 숨을 내뱉을 때까지의 그 모든 시간은 경건하고 조용했다. 마치 의식이 치러지는 것 같았다. 다자이는 이게 의식이라면 오다는 그저 제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담배가 떨어지자, 세상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의식에 이어진 신의 장난이리라. 다자이는 한참 오다의 앞에 앉아 있다가, 그를 바닥에 편히 눕혀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괴로운지 그렇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굳이 얘기하자면 쓰라린 것이라고 말할 테다.

 

 

 

 

 

  • (新晴) : 오랫동안 오던 비가 멎고 말끔히 갬

 

 

장마철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제 끝자락이라고 원 없이 내리는 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자이는 울음을 너무 참았더니 짓물러 버린 눈가를 매만지며 한숨을 내뱉었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펑펑 울걸 싶기도 했으나 결국은 짧은 후회에 지나지 않았다. 집 안을 둘러보다가 다자이는 눈에 막 들어온 탁구공 하나를 집어들었다. 오다와 대화를 나누다 한번 내기해 볼까, 하는 말이 나왔길래 언젠가는 써 보려고 샀던 것이었다. 검지와 엄지 사이에 두고서 만지작거리며 공을 굴리다가 내려놓았다. 방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하얀 천 한 장을 또 들고 나왔다.

 

"나는 비가 싫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방금 꺼내온 천과 탁구공을 들고서 소파에 걸터앉았다. 탁구공 위로 천을 씌우고는 동그란 부분만 끈으로 묶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이리저리 틀어 여러 각도에서 살피고는 펜 하나를 가져와 동그란 곳 표면에 얼굴을 세심하게 그려넣었다. 테루테루보즈(照る照る坊主)였다. 이대로만 매달면 비가 멈추기를 바라는 인형이다. 다자이는 창문을 열어 위쪽 지지대에 인형을 매달려다가 멈칫했다. 열린 창문으로 조금씩 들어오는 비가 손끝을 적셨다.

 

비가 오는 날은 도무지 견디기 어려웠다. 오다와 처음 만나게 된 날부터가 비와 함께였다. 비 내리는 날이면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다고 칭얼대던 게 사라진 것도 오다 때문이었다. 설마 우중에 대화를 나눌 상대가 생길 것이라고 누가 알았겠냐고. 오다와 만난 이후로 비 오는 날이면 비밀스러운 둘만의 시간이었고, 남들은 들을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었으며, 오다와 함께 자신의 집에서 지낼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비 오는 날이 좋았다. 더 이상 비를 맞으면서 걸어다니지 않아도 죽음을 재촉하지 않아도 삶의 이유를 오다에게서 찾을 수 있으니까. 비 오는 날이 좋았다. 정말로 그랬다.

 

인형을 조금 만지작거리다 다자이는 그것을 뒤집어 매달았다. 바람 때문에 천이 팔락거렸다. 그리고는 창문을 닫았다. 유리창 너머로 잔잔하게 흔들리는 인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제 저 인형은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인형에 불과했다.

 

다자이는 더 이상 비 오는 날이면 자신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돌아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형을 거꾸로 매단 것은 이렇게 앞으로도 영원히 어느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계속 비가 내리다 보면, 언젠가는 오다의 목소리가 들릴 것도 같아서라고. 다자이는 인형에게서 눈을 돌려버렸다. 테이블 위에 얼굴을 묻고 엎드리며 숨을 뱉었다. 비가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건조한 목소리가 찢어지듯 한 이름을 불렀다. 오다 사쿠.

 

  끝나지 않는 적막 속에서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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